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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신,정수남(2015)_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qusdnwls 2025. 5. 11. 01:45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감정이 우리의 사회적 삶과 상호작용에서 어떻게 작용하며, 또 그것은 사회의 변화를 촉진하거나 지체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주목한 책이다. 두 저자 박형신과 정수남은 감정을 거시적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이론적·방법론적 가능성을 모색해온 사회학자들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감정사회학, 특히 거시적 감정사회학에 주목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사회학이 중시해온 '합리성'의 패러다임만으로 해명될 수 없는 여백을 메우고자 했다
저자
박형신, 정수남
출판
한길사
출판일
2015.12.18

 

거시적 감정사회학을 위하여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괜히 심오한 제목을 가진 책이지만, 이 책은 정말 감정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나?” 라는 호기심을 사회학적으로 풀이한 연구서이다. 통상 감정이라는 변수는 사람 대 사람 혹은 사회 대 사람 간 관계에서 논의되어 왔지만, 반면에 사회구조 및 사회변동에서 감정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논의되었다.

저자들이 진단하기에 아마 이는 사회학의 주류가 합리성패러다임에 의해 발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많은 개론서 언급되듯 이 사회학의 본질 자체가 인간세계를 규명하고 그 내면의 의미를 밝히는 것에 있다 보니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이론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분석을 딱딱 나눠 떨어뜨리기에는 뭔가 애매한 경향이 있다. 만약 사회학이 이러한 영역을 욕심내게 된다면, 저자들이 지적하듯 사회학 자체의 본질을 잃은 채 인간의 삶을 공허하게 표현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아무튼 저자들은 이렇게 감정과 이성을 구분하고 감정을 지우는 작업에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한 것이 사회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베버의 합리론과 파슨스의 감정제거 작업 참고).

 

아무튼 사회과학이 감정을 제거하는 것에 일조혹은 용인을 한 탓인지 감정은 감추거나 함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된 것 같다. 저자들에 따르면 감정에 대한 현대의 논의는 세 가지 관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는 치료요법 관점, 구성주의 관점, 거시사회학적 관점을 의미하는데, 앞의 두 관점이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감정을 다루어오던 관점이라면 마지막 거시사회학적 관점은 기존 관점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이다.

저자들이 지적하듯 치료요법 관점이나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감정을 바라본다면, 감정은 특정한 상황에 의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특히 치료요법 관점의 전제에서 생각해 본다면 인간은 감정에 취약하여 긍정적인 감정이 아닌 우울이나 화 등의 감정에 의해 부적절한 행동동기를 가지게 되므로 감정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 치료요법 관점의 경우 부적절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서사를 강조하며 이러한 관점은 최근 유행하는 긍정심리학이나 시중의 자기계발서나 동기부여 격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좋고 나쁨의 문제를 떠나 이러한 관점은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내면세계의 문제로 환원할 가능성이 있다.

구성주의적 관점은 특히 사회과학에서 많이 보이는 용어 같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감정은 특정한 사회적 환경이나 구조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요약했지만, 느낌만 보더라도 거시이론보다는 미시이론, 특히 문화이론에 좀 더 가까운 개념인 듯하다. 그래서 문화이론에 맞춰서 설명을 재단한다면 구성주의의 중요한 전제는 인간은 상황을 인지하고 해석한다.’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구성주의에서 감정이란 인간이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며 문화코드 혹은 규범을 인지하면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일례로 사회적으로 잘못을 인지했을 때 죄책감과 후회를 느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은 아무리 싫은 사람의 경조사라 할지라도 경조사의 규범에 맞게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을 표출하거나 억제하는 것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구성주의 관점의 맞은편에는 실증주의 관점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실증주의에서는 구성주의와 달리 감정을 좀 더 생물학적 반응으로 바라본다. 더불어 실증주의는 이러한 생물학적 반응인 감정을 유발하는 것이 특정한 사회적 자극에 있다고 본다. , 구성주의가 한 사회의 문화규범을 인지하여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면, 실증주의는 실제로 표출되는 감정에 주목하며 이러한 감정은 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처한 지위에 따라 달라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권력과 지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꼭 누군가의 비고에 슬픔의 감정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지위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무감각할 수도, 혹은 오히려 기뻐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쨌든 구성주의와 실증주의의 관점은 결국 사회적 요소가 감정 표출의 전후 어디에 개입하는지에 따른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구성주의는 감정이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인간의 인지에 따라 관리될 수 있다는 관점이라면 실증주의는 감정이란 사회적 자극으로 의해 촉발되는 하나의 반응이라는 관점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실증주의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화를 표출하기는 하지만(일차감정) 동시에 구성주의에 따라 이러한 화를 인지하면서 후회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듯이(이차감정) 어떤 한 관점으로 감정에 대해 속단하기는 힘들다.

 

이처럼 치료요법이나 구성주의 등 한 관점으로 감정을 속단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감정이 생각보다 특정한 상황이나 구조의 결과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감정의 성질에 대한 딜레마에 주목해 치료요법 관점과 구성주의 관점의 한계를 언급한다. 이 두 관점의 공통적인 전제는 사회->개인이다. 결국 앞의 관점을 넘어서 거시사회학적 관점으로 감정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감정의 복합적 성질을 이해하고 사회->개인->사회라는 새로운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감정을 종속변수가 아닌 독립변수로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감정에 의한 개인의 행위도 사회구조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새로운 인과관계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길게길게 복잡하게 말했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합리적이라 여겨지던 감정 배제의 논리를 넘어서자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우리는 사실 기반’,‘냉철한’,‘분석적인’,‘T스러운느낌으로 합리성을 정의하지만 저자들이 말하듯 우리는 접객에 따른 기분이 어떤지에 따라 구매를 결정하거나 선거에서 국민 정서라는 용어로 합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만약 합리라는 말을 선택이라는 인간의 행위 범주로 설명한다면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이 크게 의미는 없을 수 있다. 이러한 합리성의 허점을 행동경제학이나 사회사상과 같은 분과가 잘 메우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경제학이나 철학 혹은 정치학의 역할이었을 뿐 사회학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다소 의문이기는 하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만 보면 저자들이 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행위와 구조를 연결 짓는 것, 그리고 이러한 연결에서 감정이 독특한 역할을 한다는 것, 정확히 말로 풀어내지는 못하지만 저자들이 말하는 그 뉘앙스는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반대로 저자들이 말하는 거시사회학적 관점을 어떻게 체감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회학이 과학이라면 이때 말하는 체감이란 인간의 눈에 맞게 재단하여 이름 붙여진 어떠한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충족되어야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들이 강조하는 감정동학이라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감정동학이라는 것을 감정 에너지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메커니즘이라는 말로 딱딱하게 요약하기에는 용어 자체가 굉장히 낯선 것이 사실이므로 저자들이 언급하는 배후감정을 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배후감정을 생각한다는 것은 특정한 사회 과정, 그러니까 삶의 양식이나 관계 등을 유지하거나 움직이는 데 어떠한 감정이 연료로 사용되는지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과 소통을 하며 상호작용을 하는 데 어떠한 감정이 배후에서 작용하는가? 사실 이러한 감정사회학의 관점이 행위와 구조를 연결 짓기에 상당히 부적절해 보일지라도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따른 그 근면함에는 어떠한 감정이 있었는지, 연대에 있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거나 갈등을 유발하는 감정은 무엇인지, 상호의례에 따른 도덕 감정은 무엇인지 등 어쩌면 감정사회학은 고전사회학자들의 은연 중 관심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는 이러한 거시 감정사회학으로 다양한 현상을 바라보는 지적 노력들이 많아진 것 같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감정과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재조명하거나(유경남·2022,“5·18항쟁 시기 대중의 감정과 저항참고.) 2008년 가족동원의 성격을 지닌 광우병 촛불시위를 모성의 실천과 전문가 지식체계에 대한 불신’, 그리고 질병에 대한 공포분노감정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등의 시도(박형신·이진희,2008 참고.)가 그것이다.

이렇듯 감정을 주요한 독립적 변수로 두고 계급과 구조를 설명해 나가는 방식의 거시사회학적 설명에서 감정은 일종의 복합체로 정의된다. 분명 감정은 생물학적 반응으로 표출되지만 그것은 사회적 맥락을 따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은 개인 내면의 역사성을 따른다. 예를 들어, 성공한 사업가들이 말하는 어릴 적 열등감이 무기가 된 사례처럼 말이다. 따라서 감정사회학 연구는 통계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물론 사회심리학이라는 훌륭한 심리학 분과가 존재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계량적 연구에서 감정은 복합체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조작적으로 정의되기 위하여 획일적으로 재단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숨기거나 조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시 감정사회학 연구는 어떠한 방법을 취하는가? 저자들은 이에 대해 구술사생애사 연구를 제안한다. 즉 거시 감정사회학에서는 당사자의 이야기에서 재구성 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간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대량적으로 데이터를 모으기보다 한 사람 개별의 사례 하나하나를 모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감정 사회학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학의 감정적 전환및 실천감각의 정치에 있다. 우리의 삶을 이성적인 잣대에서만 평가를 한다면 그 삶은 얼마나 공허해지는지에 대한 반성은 곧 사회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고전 사회학자들이야 살던 시기가 근대 초기였다 보니 만이 판단 가능하다 여겨졌던 인간의 삶을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를 그들 스스로의 꿈과 목표로 가졌을 수도 있다. 다만, 현대는 그렇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를 상징체계 등으로 설명하는 문화적 전환을 거치게 되었고, 이러한 시류에서 사회학은 고전 이론을 극복해 왔었다. 그 과정에서 감정이 주목을 받게 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적 이론은 감정이나 성별 등 정체성을 일종의 사회적 결과물로 만들어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관점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2030의 무기력함은 고용충격으로부터 오는 우울에서 기인한다.”라는 말은 청년 정신건강의 문제를 사회적인 이유에서 찾을 수는 있으나 이 청년들이 그러한 감정을 어떻게 재해석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청년들이 집합적으로 겪는 이 우울이라는 것을 겪음으로써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저 청년들의 청년들 스스로 숨기거나 관리하거나 혹은 제거해야 하는 극복의 서사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거시감정사회학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감정적 전환을 말하고 있다. 이 전환으로 인해 합리성의 사회학 뿐 아니라 감정적 사회학(나는 이것을 인문학적 사회학이라고 배운 것 같다.)이 사회학의 한 축에 서서 개인의 삶을 좀 더 풍부하게 표현하여, 감정변수를 통해 기존 논의되어왔던 다양한 현상과 사건을 다각도로 점검해 사회학적 상상력의 빈곤에 갇히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감정사회학은 특정한 현상을 예측하여 특정한 인과관계를 발견하는 데 많은 약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기존의 사회과학이 감정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도 정말 단순하게 특별히 감정을 연구할 방법론이 없기도 하고 감정을 연구해 봤자 실질적인 사회적 대안을 세우는 데 한계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사회과학이 인과성에 치중을 하다보면 개별 사례가 갖는 특수성 등을 도외시 하거나 인과성 자체만을 중요시 여겨 정책을 개발하게 되므로 정책 대상자들의 상황 및 감정 상태를 배려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감정사회학은 합리성의 사회학을 인정하면서도 특정 행위의 배후에 감정이 작동하고 행위자의 감정 형성의 과정을 포착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관점에서 맞춤형이 아닌 개별 행위자 관점에서 맞춤형인 사회정책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저자들의 예시를 인용하자면, 빈곤정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빈곤을 개인의 책임으로 본다면 그 감정은 수치심이고, 빈곤을 사회적 책임으로 바라볼 경우 그 감정은 분노이다. 빈곤을 부정한다면 좌절을 경험하며, 빈곤 앞의 미래를 긍정한다면 희망을 경험할 것이다. 개인이 빈곤의 책임을 인정한다면 순응과 개인적 혁신을 경험할 것이고, 빈곤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개혁투쟁의 경험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때, 빈민이 앞의 다양한 스펙트럼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따라 국가와 사회는 재사회화, 직업교육, 정책적 배려, 제도적 개선 전략 등 다양한 해결책으로 대응할 수 있다. , 결국 감정사회학의 목표는 사회학의 감정적 전환을 통해 감정정치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데 있다.

 

이 책과의 첫 만남에 대해 대충 말하자면 예전에 한국사회의 그러니까 울분에 대해서 뭔가 아이디어를 정리할 때였다. 나는 전공이 사회학,사회복지학,3전공(자기주도설계전공이라 쓰고 수료 못한 전공이라 부른다..)이었는데 어떻게든 전공 간 교집합을 만들다 보니 복지국가라는 요상한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사회 단위에서 시설 후 사회복귀, 통합과 갈등 봉합 등의 주제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끔은 연대감수성의 정신을 담은 이러한 논의들이 나의 성별, 먹는 취향, 살아가는 방식 등 소위 주류라 불리는 나의 정체성을 버리게끔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의 삶이라는 게 특정 영역의 논리와 이성적인 영역에서 판단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 가치라는 것을 꼭 갈등과 연대라는 양자대결의 구도로 바라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주류사회의 울분이라는 감정을 담은 한 가설을 개인적으로나마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그래도 나름 복지국가라는 논의에 맞게 뭔가 울분이라는 감정이 사회갈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심리사회적 관점이 아닌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근데 이게 말이 쉽지 감정을 거시적으로 본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던 찰나 복지국가’,‘감정이라는 키워드로 막 구글링을 하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소위 우경화혹은 보수적인사람이라서 그런지 아무래도 나는 젠더, 환경, 평화 등 이러한 가치와는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나라도 운이 좋았던 건지 돌이켜 보면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위해 광장도 나가고 여러 기획도 하던 훌륭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지냈던 것 같다. 눈빛들이 좋은 의미로 돌아있었는데(?), 아무튼 그들이 지쳐 나와 같은 눈빛이 되어 뭔가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씩 이 책의 구절을 필사해서 주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공포라는 감정을 말하고는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존중이 필요하다는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말을 꽤 설득력 있게 이론적으로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때 나는 뭔가 그들 스스로가 애쓰는 것들을 현실적이지 않은 헛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임무로써 받아들이기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분명 실천감각의 정치로서 연대와 감수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임무는 분명 갈등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을 말만 할 뿐 딱히 행동에 옮기지도 않고 실질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번지르르 한 위로를 건넨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공감과 이해 등 감정이 중요해지는 현상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어떠한 사안에 대한 사실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호소에 사람들의 판단이 뺏길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때로는 이성을 통한 비관과 함께 감정을 통한 낙관 역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점차 개성이 다양해지는 시대에 타인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타인을 느끼는 것역시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전제에는 타인에 대한 희망에 힘을 쓸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하는 것이 사실이고, 또 누군가는 어떠한 한경과 기질에 따라 그것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때에 따라서 이 책은 선천적으로 감수성이 뛰어나거나 사랑의 실천에 익숙한 종교인, 그리고 일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검토하지 못한 점이 나름 이 책의 한계라면 한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밝혀야 할 게 있는데 이 책의 부제는 공포감정의 거시사회학이다. 다만, 책 본문의 내용보다 감정을 거시사회학적으로 바라본다는 다소 요상한 관점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다 보면 사회학이 무엇이고 어떠한 논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소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책의 첫 장이자 플로로그에 실린 거시사회학적 감정사회학을 위하여라는 논문만을 리뷰했다. 실제로 감정은 실증주의와 해석주의, 그리고 방법론적 개인주의 or 전체주의, 실재론과 명목론 등 다양한 논점을 지닌 대상인만큼 관심을 갖고 책을 읽는다면 꽤 재밌는 지적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외에도 책은 식량안보, 노숙인 무관심과 공포의 감정동학, 공포와 복지정치 등 다양한 흥미로운 주제들을 담고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정독하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