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시금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한 논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이 올 때마다 나름 사회를 들여다 본다는 사회학은 어떻게 시대에 응답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을 받기도 한다. 요즘에야 이러한 논쟁을경제나 정치의 언어로 풀어내는 경우가 빈번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맥락을 설명하는 데 있어 여전히 사회학은 "사랑 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아무튼 사회과학에서는 이 근대화론 논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사실 이 근대화론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마 1945년을 기점으로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헤게모니 국가로서 세계의 무대에 올랐을 때 각광을 받았던 것 같다. 제국주의의 식민지들이 막 독립 하던 시기에 "미국처럼 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가 따라올 것이다."라는 것이 근대화론의 주요골자였다. 이제 독립을 시작하던 국가들에게는 이 근대화라는 불가항력적이고 세상의 당연한 물살을 어떻게 타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이때 이러한 국가들에게 근대화의 경로를 미국이 제시한 것이다. 경제발전은 곧 민주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미국 스스로를 모범사례로 소개한 것이고, 이에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경로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 점은 미국이 세계 패권 국가가 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 그러니까 "일제가 없었으면 한국 근대화 못했을걸?" 이라는 이 의견도 미국이 제시했던 근대화론과 크게 다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근대'를 이야기 할 때는 산업화(경제발전)과 함께 신분제 철폐, 국민국가 형성을 함께 말한다. 일제가 한국에 있어 산업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사실이겠으나, 일제가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에 영향을 주었는가? 이 대답은 여전히 모호하며, 같은 맥락으로 소위 말하는 한국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1년 이후를 마냥 경제발전이라는 이유 하나로 긍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화론이 말하는 "경제발전이 되면 민주주의로 간다."라는 이 명제는 사실 "대학가면 여자친구 생긴다."와 같다. 경제발전이 항상 민주주의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당장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왜 민주항쟁, 촛불을 계속 이야기 하는가? 말 그대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논리라면, 이렇게 단선적으로 역사가 결정된다면, 굳이 우리 역사에 있어 어떠한 사건과 희생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즉, "경제발전이 되면 민주주의로 간다."라는 이 논리는 상당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역사를 돌려 보는 것이다. 어떠한 조건이 현재 우리가 민주주의인듯 아닌듯한 세상에서 살게끔 했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서 말이다.
그러한 근대화론의 단선적인 역사경로를 뒤짚고 근대화의 경로를 새로이 설명한 사람이 배링턴 무어(B.MOOR)이다. 정치학자이지만, 그의 저작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명실상부하게 사회학 명저 중 하나로 꼽힌다.
무어는 근대화의 결과를 ‘내생적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국가들을 ‘나열’하고, 이 나열된 국가들이 ‘부르주아 혁명’,‘위로부터의 혁명과 파시즘’,‘아래로부터의 혁명과 공산주의’라는 세 경로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분류’하여, 전근대적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적 산업사회로 이행을 촉발하는 동력 및 지주 계급과 농민 계급 등의 역할을 통해 어떤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등장하고, 독재가 등장했는지 그 기원을 다음과 같은 ‘요인’으로 ‘설명’했다. 즉,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다양한 국가의 경로 분석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을 가면 연애를 할 수 있다"라는데, 몇몇 사람을 보니 대학을 가도 여자친구가 안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깐 보아하니 외모와 같은 그들의 내재적 요소에 의해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누구는 연애를 못하는 경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무어는 근대화의 경로를 세 가지로 구분 했을 때, 이 경로는 각 국가의 계급의 연합과 정치적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분석은 각 국가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게 되었다.
무어는 계급의 연합과 계급의 역할을 중심적으로 이론을 설계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이러한 무어의 이론을 빌리면, 북한을 약간 설명해 볼 수 있다. 즉, "북한은 시장화에도 불구하고 왜 '총동원 체제'와 '가족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보통 우리는 폐쇄적인 북한의 체제 특성과 외교적인 상황으로 이를 설명하지만, 무어의 이론을 빌리면 북한 내 계급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설명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계급은 ‘비적대적’ 특성을 가지며, 소위 ‘인민’을 노동자,농민,기업주,자유직업인 등으로 ‘성분’을 분류해 이에 따른 지위나 재화의 분배 등을 통제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국유사업을 위주로 경제를 계획하는 북한사회에서는 무어가 말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신흥 자본가 계급이나 시민계급이 출현하기 힘드므로, 사적고용이 이루어지기 힘들 테니, 애초에 북한이 ‘시장화’ 혹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본가와 노동계급 간의 연결이 이루어지기 힘들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힘들다."라는 일종의 분석을 낼 수 있겠다.
그래서 말 그대로 한 국가가 상업화로 나아갔을 때, 그리고 부르주아(상업계층)이 큰 힘을 발휘하고 주도적으로 '혁명'을 이루었다면, 영국과 프랑스 미국처럼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갔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인데, 가끔 민주주의가 이상하게 변질 되어서 독점 자본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독일과 일본처럼 말이다. 이를 '파시즘'이라고 하는데, 무어의 설명으로는 이는 부르주아의 힘이 너무 약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어떤 경로로 이루어지는가? 위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단 상업체제로의 전환이 미비한데다 제국주의와의 대결이 있었기 때문에 농민 역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공산당은 농민의 자원을 통해 공산주의를 이륙할 수 있었다. 이것이 무어 연구의 요약이다.
그러니까 결국 무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부르주아가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혁명을 했던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민주주의로 나아갔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파시즘으로 근대화의 경로가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경로 사이를 결정하는 것이 농민혁명이라는 것이다. 결국, 부르주아가 잘 역할을 하면 민주주의, 그렇지 못하면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독재로 나아간다는 게 핵심이고 그래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어의 연구를 한국 사례에 적용했을 때는 어떨까? 우선 무어의 연구를 한국 사례에 적용한다는 것은 곧 해방 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한국의 정치발전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즉, '조선'은 다른 근대화 경로를 밟은 국가와 달리 농민들의 불만과 불평등이 심했음에도 혁명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파시즘 체제에서 경제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 분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 같다. 아마 농민과 부르즈아 계급이 어떤 계급에 의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너무 단선적인 역사만을 이야기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사실 무어의 연구가 한국에 적용되기는 어렵다. 일단 식민지라는 외부 변인이 한국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어 연구의 한계이고, 이후 스카치폴이라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자신의 스승인 무어를 비판하는 이론을 국제적인 변인까지 포함해서 '국가와 혁명'을 통해 설명한다.
그럼에도 무어의 연구는 식민지라는 변인에 계속 얽매인 것 외에 다른 논점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이를 테면,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로 ‘식민지’라는 변수 없이 한국이 자본을 축적하고 근대화를 이루었을지 질문해 볼 수 있겠다. 이것이 지금 식민지 근대화론과 계속 맞어왔던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어는 이론으로 보았을 때, 근대화 이전 ‘조선’으로 불리었을 때의 상황에서 상품경제의 발전 정도는 어떠했고, 이러한 발전을 주도한 세력(계급)을 누구로 보는 것일까? 이를 농민계급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만약 농민이 경작을 해도 이 경작물을 파는 것이 지주계급이면, 이것은 ‘소외’를 의미할 텐데, 그렇다면 동학농민운동처럼 소농 같은 농민이 토지의 소유권을 얻기 위해 투쟁을 해서 성공했다면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이어가지 않았을까? 즉, 조선 말에 지주계급 위주의 근대화가 아닌 피지배계급인 농민 주도의 지권에 대한 요구로 인해 근대화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즉, 『근대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등 여러 자료에서 지적되었듯이 개항기 말 관료제를 용인하던 지주가 아닌 신흥 지주계급 혹은 농민으로부터의 변화(혁명)가 이루어졌다면, 한국의 산업화와 정치발전 시나리오는 어땠을지 질문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여기에서도 결국 일제라는 제국의 변수 설명을 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어쩌면 무어의 연구는 부르주아의 역할을 강조했기 때문에, 당시 '조선'과 이후 '한국'에서 농민이나 노동자, 자본가 계급 등 단독계급의 체제 변화가 불가능했을지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가 아닌 농민이 민주적 정부를 세울 가능성은 없을까? 결국 무어의 이론이 의미가 있는 것은 경제발전 후 민주주의라는 단선적 노선을 비판하는 데 있는데, 사실 무어의 이론의 핵심인 잘 교육받고 부유한 부르주아라는 조건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있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니, ‘산마리오’ 같은 부르주아가 약한 환경에서도 농민을 민주적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던 농민 공화국의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을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무어의 연구가 미국 중심의 근대화론을 비판한 것은 맞지만, 결국 무어의 연구도 제3세계의 상황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근대화 경로를 밟아야 하는 국가들에게는 적합한 근대화 경로 이론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동시성의 비동시성, 그러니까 이미 근대 이후의 시점에서 근대화 작업을 해야 하는 국가들에게는 어떠한 이론이 설득력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