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시작: 2023. 12. 25. 19:00
작성 끝: 2024. 10. 06.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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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적 사고방식’. 즉,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사회과학을 접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익히게 되는 개념이다. 그만큼 사회과학 전공의 목표는 어떠한 지식을 배우는 것 보다 특정한 사고방식을 훈련하는 것에 방점이 있겠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 사회란 무엇인지, 과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사고(사유)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과학과 상상력이라는 용어가 상충되지 않고 공존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옳은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의문을 풀어가는 것이 곧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을 훈련하는 방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철학스러운” 사고방식은 때로는 복잡함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확실한 설명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마치 유사과학처럼 느끼게끔 한다. 이것이 대중들이 사회과학을 접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이고, 무엇보다 실증적이고 양적인 방법으로 사회현상을 진단하려는 시도가 크게 발전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단순해 보이는 저 한 문단에 내가 생각하는 사회과학, 정확히는 사회학의 정의, 사회학의 방법론, 그리고 전공에서는 딱히 다루지 않는 사회학 위기론을 모두 담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의 대표로 사회학의 사고방식을 말하게 되겠다. 결론적으로 사회학은 나에게 아무런 이득을 가져다 준 것이 없다. 그래서 사회학 책들은 안 보이는 곳에 모아두었는데, 가끔가다 사회학 책들을 보면 가끔은 설레기도 하고, 마치 먼 외국에서 향수병을 앓다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햇빛을 쬐며 낮잠 자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저 한 문단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 글은 이러한 느낌에 대한 '자기소묘'이기도 하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이미 저서로 답을 정리했을 테지만, 나 스스로도 이해 못하는 어려운 석학의 의견을 읽고 줄줄이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 개인의 생각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그러니 나름대로 듣고 본 내용과 나의 생각을 적절히 섞어 여러 편으로 나누어 기록한다.
내 전공이 도대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 스스로에게도 많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적어도 대학에서 전공을 한다는 것은 대학의 언어로 따지면 무엇을 공부 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공부의 의미에 대해서 먼저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공부는 위의 그림처럼 한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파란색 획은 각각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그리고 검은색 획은 사람을 의미한다. 때문에 첫 번째 ‘공’은 사람이 하늘 아래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을 의미하며, 두 번째 ‘부’는 사람이 커져 하늘을 넘고 땅 아래 뿌리를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부란 “삶을 통하여 터득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이다(쇠귀).” 그러니 공부를 하는 것에는 어떠한 이유나 원인을 말할 수 없다. 공부는 비록 내가 원해서 삶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그리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일 뿐이다.
즉, 나의 삶을 사회라는 분석틀을 통해 과학이라는 매개로 고민하는 것이 곧 ‘사회과학 공부’라고 할 수 있겠다. 공부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언급하였다. 이 점에서 사회과학은 우리 모두가 이미 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질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 사람은 알기나 할까?”, “이제 기계처럼 살게 될 텐데, 어떤 취미라도 가져야 하나?”, “난 왜 이 사람이 좋았다가 이제는 이유 없이 싫을까?”, “왜 마음에도 없는 감사와 죄송함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할까?”, “이제 부담스러운데 언제까지 저 사람하고 연을 지속해야 하는 걸까?”, “조금 쉬고 싶은데 여기서 멈추면 내 공백기는 누가 알아주지?”, “그때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정상적인 속도로 나아갔을까?”, “ 이를테면 이러한 질문을 예시로 말해볼 수 있겠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씩이라도 한 번씩 머릿속에 스치는 이 질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실 아주 단순한 답인데, 첫째로 이 질문들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가치관을 드러내주고 있다. 둘째로, 이 질문들은 이러한 가치관이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닌, 타인 및 사회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났음을 말해준다. 즉, 나의 인식에 대한 인과관계적인 설명을 말해준다. 단순한 두 가지의 답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두 가지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알 수 있겠다. 하나는 사회란 “2인 이상의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시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과학이란 ‘한 현상의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나를 잠시 멈추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개요적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정리하면 위의 그림과 같다. 우선 ‘나’와 ‘사회’라는 두 단위가 양축에 보인다. 이때, ‘나’는 어떤 사상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회라는 것은 집단적인 어떤 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세계, 세상, 시민 등의 개념으로 구체화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단위는 서로 상호작용한다. 일례로, “편견”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편견은 간단히 말해 나의 경험과 잣대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이러한 경험과 잣대라는 것은 내가 사회적으로 겪었던 어떠한 사건에서 발생하므로 편견은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곧 ‘나’가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이다. 이때, 이 관찰은 한 현상의 인과관계를 보증하는 설득력을 가진 관찰인지 점검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이것이 과학적인 바라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어렵게 ‘방법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사회과학은 사회현상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어려운 말이 있기는 하다. 이는 마치 자연과학이 ‘비가 내린다.’라는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이론적으로 밝히는 것처럼 “요즘 애들 왜 이러지”라는 말, ‘사람들이 점차 혼자 지내는 것.’, ‘청년들의 N포’, ‘계급별 복지인식의 차이’, ‘한국 사람들의 능력주의 문화’와 같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 등 사회적인 것을 밝히는 것이 사회과학의 목표라는 말이기도 하다.
당연히 맞는 말이지만, 이러한 것들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는 데에는 사실 객관적인 숫자 지표가 절대적이기도 하고, 주제 하나하나가 너무 거시적이라 실태적인 현상파악은 용이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 사회학의 창시자인 콩트는 사람들이 먹고 행동하는 것을 포함해 사회현상도 자연과학처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확실성을 가지기 보다는 경향적인 특성을 지닌다. 즉, 예측은 하지만 절대적으로 이렇다 저렇다를 말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이것이 사회현상의 고유한 특성을 물질과 물리법칙 등으로 치환해서 나온 ‘환원주의적 오류’이다.
물론 실증적으로 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한 사람의 삶의 인과를 숫자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숫자의 맥락을 읽는 작업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양적연구 역시 인본적인 가치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청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할 때 성별을 남성, 여성으로 특정 짓는데, 성별 정체성이 여러 가지인 사람의 데이터는 조사할 수 없는 것인가? 혹은 취업스트레스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려고 하는데, “한국 대졸자”만을 대상으로 하면, 이민자나 고졸자의 의견은 반영하지 못하지 않을까? 와 같은 질문을 통해 표본을 추출하는 과정이 양적 연구에서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적 연구는 결국 양과 숫자라는 객관적인 지표로 몇몇 의견이 배제되더라도 보편적인 경향을 설명해주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사회과학의 목적에 있어서는 다소 한계점을 보인다. 따라서 특정 대상자의 삶을 인터뷰하고 관찰해 삶의 맥락을 살펴보는 “생애사” 질적 연구, 다른 사회와 우리 사회를 비교하는 비교방법론, 혹은 과거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한 사회의 특성을 현재와 미래에서 발견하려는 역사 분석적 시도 등도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포함 될 수 있겠다.
내 지식이 부족해 어렵게 설명했지만, 결국 특정한 가치관을 가진 우리는 세상에 대한 잠정적인 가설을 생각해 낸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던 특정한 방식으로 가설을 증명해냄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법칙을 발견해낸다는 것(이론)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때, 계급을 중심으로 세상을 본 결과에 대한 설명, 혹은 역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세상을 본 결과에 대한 설명이 하나씩 분과를 이루어 계급 사회학, 역사 사회학 등의 사회학 분과를 만들어 낸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보통 사회학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가치관을 알기 위해 사회사상사와 일반적인 설문에 필요한 양적연구, 질적 연구 지식 외에 ‘사회과학방법론’이라고 해서 과학철학도 다루는 편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환원주의와 실증주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현상의 ‘증명에 대한 설득’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론을 맹신하면 사회학의 목표를 잊어버릴 수 있다. 이러한 사회학의 위기 속에서 사회학 본연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응답하는 사회학’, 즉, 소통학문으로써의 사회학의 역할을 기대하는 움직임인데,『세상물정의 사회학』,『편의점의 사회학』과 같은 책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는 우리의 삶 자체가 사회적인 것이니 삶과 일상을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취한다.
자세한 예시로 부르디외의 마지막 저작『자기분석을 위한 초고』이야기가 도움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비투스, 장, 구별짓기, 상징폭력이라는 개념을 알지만, 아무래도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이론이 부르디외의 성장배경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부르디외는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우체국 직원으로 살았던 아버지와 부유한 부농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남의 시선에 민감했으며, 부르디외에게 옷 입는 방식, 말하는 법, 식사예절 등을 가르쳤지만, 역시 떡잎이 다른 미래의 사회학자답게 부르디외는 어머니가 해준 가르마 머리를 흩뜨려버리거나 저항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부르디외의 손은 항상 희고 깨끗해서 부르디외가 살았던 농촌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생각할 수 있듯이 개인의 지적 바탕에 끼치는 가족의 영향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배경에 ‘질문’을 던지며 ‘아비투스’라는 이론에 대한 밑바탕을 쌓았던 것이다.
또, 부르디외는 당연히 공부를 잘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프랑스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그랑제콜 예비반에 입학했는데, 이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부르디외는 부르주아 가정 출신의 아이들과 자신과 같은 지방 출신의 아이들의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목격하게 된다. 당연하겠지만, 지방 출신의 부르디외라면 부르주아 학생들에게 “표준말 모르냐. 말투가 왜 그러냐”, “물건은 왜 촌놈처럼 정리하냐” 이런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군대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부르디외는 이러한 부르주아 학생들의 행태를 보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 이야기 역시 우리 모두가 생각할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가 환경 등에 따라 다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이러한 생각에 학문을 입혀 ‘상징폭력’,‘문화자본’,‘구별 짓기’라는 이론에 설득력을 부여했던 것이다.
성인이 된 부르디외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심지어 전쟁 당시 군인으로 징집되었을 때, 부르디외는 전쟁 속 알제리의 모습을 현장연구 해『알제리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념과 개념만으로 현실을 논하는 파리 중심부 지식인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철학-인류학-사회학으로 전과를 해왔던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배경 덕에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마르크스든 베버든 어떤 한 계보에 묶이지 않았다는 평가를 듣고는 한다. 아무튼 이러한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의 경험과 상처가 부르디외로 하여금 ‘장’ 개념에 대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결국 부르디외는 마지막 저작에서 자신의 지적작업이 자신의 생애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 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사회학자 부르디외처럼 ‘상상’ 하면서 살아간다. 위에서 언급한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 사람은 알기나 할까?”, “이제 기계처럼 살게 될 텐데, 어떤 취미라도 가져야 하나?”, “난 왜 이 사람이 좋았다가 이제는 이유 없이 싫을까?”, “왜 마음에도 없는 감사와 죄송함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할까?”, “이제 부담스러운데 언제까지 저 사람하고 연을 지속해야 하는 걸까?”, “조금 쉬고 싶은데 여기서 멈추면 내 공백기는 누가 알아주지?”, “그때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삶은 정상적인 속도로 나아갔을까?” 이러한 질문들 말이다. 우린 이 질문을 ‘원인과 결과’라는 하나의 틀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린 이미 위의 질문을 해결할 때 스스로의 과거 경험부터 가족으로부터의 생애경험, 그리고 심지어 본인의 사회적 위치와 돈의 크기까지 생각을 하지 않던가? 이러한 생각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거지?’,‘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지?’라는 질문을 통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이처럼 나의 행동과 정신을 결정하는 원인, 즉, 어려운 말로 ‘사회적 구조’라는 틀에서 나의 삶의 결과를 살펴보고 예측하는 일련의 활동을 통틀어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른다. 즉, 개인과 역사, 그리고 구조라는 세 단위를 함께 엮어서 사고하는 것을 곧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한다.
이 설명이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으로 보일까봐 조금 강조하자면, 철학과 사회학적 상상력은 분명히 다르다. 세상에 질문을 던질 때 철학은 성악설을 묻지만, 사회과학은 인간은 이타심과 이기심이라는 자연적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어떠한 원인에 의해 어느 하나의 속성만을 발현하는지를 묻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은 ‘희망’을 의미한다. 과학은 힘과 힘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물리학). 만약 내 삶을 사회구조라는 틀로 인과적으로 바라본다면, 자연과학이 그렇듯 내 삶의 결과를 추동하는 어떠한 힘, 그것이 자본주의든 계급이든 이러한 힘을 알 수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만약 나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면 이러한 힘의 작동원리를 파악하고 미약하게나마 삶의 결과를 결정하는 원인을 바꾸는 방향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회학적 상상력은 ‘치유’를 의미할 수도 있다. 지금껏 혼자서 아파했던 날들이나 후회되었던 순간들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원인 때문임을 안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하나의 매개가 될 수 있겠다. 반대로 사회학적 상상력은 곧 ‘체념(혹은 수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계급 등 이러한 거시적인 요인은 사실 개인의 힘으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연대’라고 말한다. 거시적인 요인에 의한 결과로 어떠한 고통을 겪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대부분의 문제이므로 이는 집합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성찰’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집합적 문제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즉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의 삶부터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본인이 생각하는 세상을 ‘꿈’ 꾸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를 종합하면, 위에서 한 말과 전적으로 모순된 결론이 나온다. 즉,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에는 인문학적 가치(철학)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앤서니 기든스라는 학자도 『현대 사회학』이라는 사회학과의 절대적인 교과서에도 ‘사회학은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다.‘라는 맥락의 상당히 모호한 표현을 써 두었나 보다. 처음 사회학을 배울 때는 이 말에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뭔 멍멍이 소리일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래서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즉, 사회학은 과학적 사회학과 인문학적 사회학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과학적 사회학의 영역은 경제학이나 정치학 혹은 융합학문에 조금씩 밀려서 그런지 사회학만의 특색을 가진 인문학적 사회학이 요즘은 주목 받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에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나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을 하는 사회학의 임무는 자신을 넘어 가족과 세상 사람들이 삶에서 겪는 억압과 고통, 고민 등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발생했음을 밝혀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학이 있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억압과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스스로의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지적 자원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이를 보통 ‘폭로’라고 말한다. 위에서 말한 부르디외의 지적 작업물들도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장막을 걷어 폭로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부르디외는 ‘사회학은 격투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회학은 ‘트리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당연하게 yes라고 대답할 때, no라고 답하는 것이 사회학의 역할이다. 그래서 가끔 사회학 전공자들이 도덕적 빠진 사회부적응자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꼭 이게 아니더라도 사회학은 하나의 사회과학적 연구작업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르디외의 작업물을 꼭 세상에 대한 폭로로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작업물을 부르디외 개인의 삶의 이야기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사회과학 연구는 하나의 창조적 작업과 같다. 창조의 가장 큰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승화’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부르디외가 상징폭력을 건조하게 책으로 써서 말했지만, 이를 겪었던 부르디외의 감정은 불행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실제로 부르디외는 상당히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와 난해한 글 전개로 유명한데, 어쩌면 이는 자신의 삶을 최대한 객관화 해서 본인의 삶에 있던 소외와 상처를 파악하고 싶었던 부르디외의 욕망이지 않았을까 싶다. 소외와 상처는 어떠한 창조행위에 있어 가장 큰 원동력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겪은 경험들은 때로는 너무나도 깊은 상처로 남아 치유가 불가능해 인생의 매 순간 고통을 주기도 한다(부르디외,자기분석에 대한 초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듯 예술과 학문의 근본 동기는 어지러운 도시에서 평화로운 산악 지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누구는 일상을 그냥 잘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지금의 일상이 버겁다. 이러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지만, 어떠한 족쇄에 묶인 듯 쉽지가 않다. 굳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우리 삶에 대입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거대한 빈자리를 객관화 시키고 이를 만들어 낸 원인을 찾아내 제거하고자 하는 ‘울분’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주관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족쇄를 풀기 위한 답을 찾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무시해 왔던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곧 ‘사회학의 쓸모’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