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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회복지향의 '탈시설' : 탈시설은 사회문화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현상인가?

qusdnwls 2024. 9. 30. 06:20

작성시작: 2024. 09. 24. 23:00

작성마감: 2024. 09.3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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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다른 양식으로 내용 참조시 첨부파일 참조.

 

내용
.시작하며


.탈시설 논쟁의 내용과 문제점
1) ‘탈시설논쟁의 내용
2) ‘탈시설논쟁이 간과한 것(공간, 당사자성, 시설을 구성하는 요소들)
3) ‘탈시설논의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


.공동체 '탈시설' 실현에 대한 시도와 방안
1) 이탈리아 협동조합 사례: 탈시설 이후 공동체 공간의 모색
2) 천주의 성요한병원 사례: ‘탈시설에서 개인 특성의 이해와 관계지향 가치를 통한 시설 개선의 방안


.‘시설시설 아닌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탈시설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
2) 공동체적 관계에서 재구성하는 삶


.나가며: ‘시설을 넘어 집으로 가는 길’,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
분절적 거버넌스 극복, 장애 당사자 자력화

 

‘탈시설’을 사회문화 현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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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논쟁의 의미와 현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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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인권을 보장 받을 것을 사회에 요구할 수 있다. 근대 이후의 국가라면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지 않고, 이에 대한 실현으로써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등이 제도를 운영한다. , 개인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추구라는 보편적 권리는 사회를 어떻게 체제화 하고, 이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준일 수도 있겠다.

  요즘은 인권이 중요한 시대인데, 이것은 개인, , 사람에 대한 가치의 변화를 뜻한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생산중심적 인간관과 현재의 인간관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장애인 복지 쪽은 후천적 장애가 80%가 넘는 시대에서 장애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장애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바탕으로 장애는 더 이상 개인의 비극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의를 넘어 장애 사자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당사자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부양의무제 기준 폐지, 장애등급제 존폐문제, 탈시설, 개인예산제 등이 주요한 논의거리로 떠오른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의 논의거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장애인이 부양의무자 기준에서 자유로워진다? 장애인에 대한 장애등급을 없앤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온다? 나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보통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논의들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사회보장의 목표라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따로 분리하고 보호하는 것이라면, 혹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 대한 시혜적인 조치를 의미한다면, 저런 논의들이 굳이 나올 필요는 없다. 장애인은 오히려 이 불리한 사회환경에서 깍두기처럼 따로 분리되어 보호를 받거나 누군가에 의해 대리적으로 의사결정을 받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장애 당사자 관점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현재 장애인 복지는 꽤 많은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따라서 이 글에서는 대표적으로 장애인 탈시설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고, ‘당사자 관점에서 개개인의 자기결정을 중시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탈시설 갈등이 왜 고착상태에 빠져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지 원인을 살펴보고, 탈시설은 곧 사회적 관계를 주도적으로 구축하고 개인의 삶을 대처하는 역량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맥락을 통해 탈시설을 사회복지정책(제도,)의 관점이 아닌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장애인 복지의 핵심적인 갈등상황에 대한 해결방안을 검토하려고 한다. 특히, 이 글에서 장애인이란 정신적 장애인, 발달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의미함을 밝힌다. 왜냐하면 사실 신체 장애인의 경우는 복지 보장구나 저상버스와 같은 환경적 변화로 인해 이미 대부분의 탈시설이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인데, 더 나아가 왜 신체적 장애인은 가능한 탈시설이 정신적 장애인에게는 그토록 어려운지 그 차이를 밝히는 것도 이 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탈시설에 대한 연구는 사회복지 외에 법조직역 등에서 많이 되어 있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탈시설에 대한 법조직역 연구들은 보통 문제해결중심이라 특정한 법령에 대한 해석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회복지연구 몇몇은 실증에 근거하기 때문에 당사자와 인권 관점을 충분히 포용하지 못하는 경우나 종교 단체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두는 경우가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부족한 지식으로 오류와 미흡한 검토가 많지만, 어떤 부분에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리고 이 마음이 사회복지 분야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나름대로 탐구한 결과를 개인적인 글 공간 한 쪽에 기록해 둔다.

 


 

탈시설 논쟁의 내용과 문제점

<'탈시설' 관련 다양한 정의들>

 

  우선 몇 가지 정의를 통해 글의 문제의식을 조금이나마 밝히려고 한다. 이 부분은 앞의 긴 서론에서도 이미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우선 여러분은 장애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하고 싶다. 아마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인은 신체 및 정신적 손상에 의해 기능이 제한된 사람이므로 경제나 사회참여에 있어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점차 가족이 분화되면서 돌봄의 책임이 국가적 의무가 되다 보니 이러한 보호에 대해서 국가는 시설보호정책을 펼쳤다. , 이 정책의 목표는 일반 가정 내에서 가족의 돌봄 부담, 돌봄 방치, 무연고 등을 이유로 돌봄 공백이 발생한 경우 일정 기간 동안 거주와 요양, 의식주를 지원할 수 있는 거주시설을 통해 이들의 자립을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ourhouse9268/

 

 

  그런데 결국 이러한 정책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시설로 가는 공간적 분리를 뜻했는데, 이러한 분리라는 것은 곧 이들의 존재가 무관심해지고 비가시화 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공간적 단절의 상황 속에서 하필 시설은 도심 외곽에 위치해 사진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는 법적으로 30인까지를 시설 수용인원으로 두지만, 예전에는 100명 이상 까지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한다. 따라서 보통 이런 시설에서는 종사자보다 수용인원이 많은 편이었으며, 장애인의 특성상 신체 및 정신적 장애인 모두 느리거나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종사자와 거주인 간의 수직적인 관계와 획일적인 생활 스케줄, 그리고 한 방에 여러 인원이 함께 쓰도록 규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물리적 학대 역시 일종의 채찍으로써 용인되었다.

  당시에는 이런 시설문화라는 것은 딱히 인권침해로 큰 조명을 받지 않았지만, 영화 도가니나 형제복지원 사건 등이 유명해지면서 이 시설문화가 가진 인권침해적 요소가 공론화 되었다. , 장애개념이 변화함에 따라 장애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 보는 시각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면서 한국사회의 장애인 보호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시설문화에 대한 여럿 의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권과 복지관점에서 해석한 '탈시설'>

 

 

  이때, 중요했던 것은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이 공표된 것인데, 헌법상 한국은 비준된 협약을 이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림처럼 두 가지의 측면에서 탈시설이 논의되었다. , 장애인은 자신의 거주지 및 동거인을 선택할 기회를 가지며, 특정한 주거 형태를 취할 것을 강요 받지 아니한다.”. “지역사회로부터의 소외와 분리를 방지하기 위해 동등하게 주거, 가정, 지역사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다.“ 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장애 당사자 스스로가 시설이 아닌 가정이나 지역사회 등 거주를 스스로 선택하고 이를 위한 삶의 조건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 장애 당사자 개개인의 개별성과 주체성이 핵심적인 장애인 복지의 가치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러한 장애인 인권기준에 있어 획일화와 위계적 구조라는 시설문화는 부정합하기 때문에 인권의 관점과 공공의 관점을 검토했을 때 모두 잔여적 복지제도에서 나온 비정상적인 공공부조제도 중 하나였던 시설보호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한 것이다.

  정리하면, 이러한 의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이 거주인을 시혜적이고 의존적인 동정의 대상으로 만드는가? 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르면 위계적인 관계로 인한 인권침해 및 획일화 된 시설생활로 인해 거주인은 꿈과 욕구 자존감을 상실하고 우울이나 불안 등을 겪는다(시설병, 시설화). 이는 곧 격리를 목적으로 설립된 시설보호정책의 결과가 수용된 사람의 기능직업적 능력을 상실 시켜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과 같다(펜허스트 판결). 그러니 동등한 사회참여와 인간발달을 이룰 기회를 박탈한 시설보호정책은 제도적 차별과도 같다. 따라서 국가는 이러한 역사를 성찰하고 시설을 폐쇄해야 하며 수용되었던 장애인들은 지역사회로 나와야 한다는 것. 이것을 탈시설로 정의한다.


 

<'탈시설'에 대한 다양한 논거들>

 

 

  물론, 이러한 의견에 대한 반박 역시 존재한다. 앞선 의견이 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같은 장애인 이익집단에서 말하는 의견이라면, 이는 보통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들의 집단에서 나오는 의견이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그림으로 정리해 보았는데,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로, 정신적 장애인은 특성상 의사결정에 필요한 인지적 판단능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애초에 이들의 대부분은 가족들의 돌봄 부담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입소를 하게 된 것인데, ‘탈시설은 이들의 가족에게 일차적으로 고통을 주고, 당사자도 방치나 학대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시설 자체가 인권침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시설적 문화를 개선하는 것도 탈시설이라는 것이다. , ‘탈시설()’을 탈출한다고 해석하기보다는 탈피한다는 맥락으로 해석해, 시설 겉면의 비인권적인 시설적인 문화을 벗겨내는 것도 탈시설을 의미한다는 의견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시설에서 비인권적인 사건이 발생한다면 주동자를 처벌하고, 시설의 규정 등을 손보면 될 문제인 것이다. , 학교나 직장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인권침해적인 사건은 발생하는데, 인권침해라는 이유로 장애인을 보호하는 거주시설을 폐쇄 한다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나고,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누군가가 있다면 묻고 싶다. 위의 논쟁에서 어떤 의견에 더 마음이 기울어졌는가? 시설을 폐쇄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대규모 시설을 소분해서 소규모 시설 단위로 만들어 시설적인 문화를 점차 개선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근본적으로 가치관의 문제이다.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측면과 제도적 측면의 충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쪽의 의견이 더 현실에 적합하고 설득력 있는지는 개인의 가치관에 맡기는 것이 옳다. 대신 이 글에서는 탈시설에 대한 논의가 왜 갈등국면에서 못 벗어나는지, , ‘탈시설에 대한 적절한 해결방안이 왜 합의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말해보고 싶다.

 

<'탈시설' 논쟁이 간과한 점들>

  따라서 지금부터는 위의 탈시설논쟁 속 많은 의견들이 간과하는 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저 긴 탈시설 논쟁에서 가장 이상했던 점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당사자가 논쟁에 없다는 점이다. 긴 서론에서 현재 탈시설의 핵심 대상은 정신적 장애인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때, 발달장애인법과 정신건강복지법을 조금 살펴보면 이들의 의사결정능려에 있어 미흡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들의 의사판단을 대리하는 것을 일정 부분 허용하고 있다. 처음에 언급한 '탈시설' 논쟁을 잘 살펴보면, 결국 이들에 대한 돌봄문제에서만 부딪히고 있다.

 

<장애인권리협약 19조 일부>

 

  우선 당사자 관점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장애인권리협약 19조의 일부 내용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 하면서 논점을 구체화 해보려고 한다. 위의 조항 내용을 보고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간단하게만 보면 선택의 자유’, ‘동등한 접근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조항은 곧 장애인 개인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따라서 논쟁에 있어서 탈시설을 반대하거나 시설문화를 개선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 조항내용이 시설 폐쇄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 조항에서 말하는 선택할 기회’, ‘특정한 주거형태를 강요받지 아니한다.’라는 말은 결국 거주시설도 주거형태 중 하나이기 때문에 당사자나 당사자의 대리인이 원하면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용해 줘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권리협약 19조의 조항을 이유로 시설을 폐쇄하는 것은 정신적 장애 당사자가 살기 힘든 지역사회로 추방해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자기결정권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결과를 낳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장애인 백서와 같은 실태자료 등을 보면, 정신적 장애인과 이들의 가족은 오히려 시설을 긍정한다. 앞에서 시설병을 용어로만 언급했는데, 시설의 생활로 인해 무기력과 우울 등을 겪고, 앞으로의 삶을 비관한다고 답한 비율도 생각보다 낮은 편이다. 주변에 정신적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치매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모두가 의존을 하며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돌봄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안타까움이 절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만약 100명의 장애인이 있다면, 이들을 장애 정도로 분류했을 때 신체장애인은 저상버스 등이 이미 있으니 지역사회로 나와 생활을 하는 게 좋고, 일반적으로 중증 발달 장애인 같은 경우는 시설에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 지역사회 자립이 어려운 당사자나 당사자의 가족 의견을 더 존중하는 방안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 조항은 사실 지적장애 변우진을 이야기 할 때 지적장애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 아닌 변우진에 초점을 맞추자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장애유형이나 정도에 맞춰서 어떠한 서비스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같은 장애유형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이와 별개로 개인의 사정과 욕구는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장애유형과 장애정도를 기준으로 서비스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것은 당사자 관점의 큰 오류이다.

 

  즉, 앞선 논쟁은 결국 탈시설로 인해 빈곤하고 미흡하며, 사회적으로 취약하다는 장애인의 배경조건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그 장애인은 어떤 이름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장애정도에 따른 대리권을 행사하는 게 곤란할지, 혹은 부담이 될지, 그리고 사회적으로 돌봄 지원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만 답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장애인에 대한 이해나 시설이 아닌 것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저 논쟁에서 너무나도 간단하게 결론이 나버린다. 양측 모두 정신적 장애인은 의사판단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만을 주목하고, 시설에 대해서는 그저 시설이라는 건물을 어떻게 할지에만 주목하고 있다.

 

<'시설'과 '사회'의 비교>

 

 

  다음으로 탈시설을 이야기할 때 간과하는 점은 공간에 대한 이해이다. 탈시설을 시설 폐쇄로 이야기 하든 탈시설을 시설 개선으로 이야기 하든 결국 모든 이야기는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지역사회와 단절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탈시설이란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장애인의 주거 공간이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시설이 지역사회에 들어가던, 시설을 폐쇄해 장애인이 지역으로 나오던 지원체계 이전에 집값 등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현상이나, 장애인에 대한 범죄인식으로 인한 거부감이 큰 장벽이 된다. 그래서 보통 인식개선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맨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자본주의적인 사회 자체가 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든 사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해 시설보호정책이 탄생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또 다른 핵심은 특히 정신적 장애인이 탈시설로 접하게 될 사회라는 공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를 특히 위험사회라고 한다. 점차 연대의식은 악화되고, 사람들은 유동적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데 모든 힘을 소진한다. 간단하게 말했지만, 실제로 사회복지 비용과 관련된 논의들을 보면 이러한 사회에서는 도덕적 관심이 커지기 힘들고, 안정적으로 공적 부조를 받는 대상들에 대한 반복지 정서도 강하다. 무엇보다 사회복지 보장은 사회 구성원의 자기이해수준에 따라 의견이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당장 하루를 살아갈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의 빈곤을 해결하는 복지정책이 시행되더라도 증세를 거부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현대사회는 개인의 구매력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소비사회이기도 하다. 이제 장애인은 예전처럼 직업 재활을 받으며, 일종의 실질적 생산인구로서 생산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 소비의 한 축면을 담당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정책적 관점으로 보면, 시설보호정책 폐지도 생산중심의 노동력이 아닌 구매력을 가진 개인의 존재가치가 부각되는 사회변화에 맞춰 복지체계가 거주시설 보다는 직업재활서비스 등 이용서비스 중심으로 개편되는 분위기에서 나온 논의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시설이후 장애인이 시설 밖 사회의 삶에 속도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내 주변 사람의 일마저 관심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일종의 도움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보통 OECD 국가 중 장애인 복지비용 지출이 낮다고 주장하거나 지하철 시위 등 장애인에 대한 전반적 차별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젠더나 퀴어, 세대 갈등과도 맞닿아 있다. 이 논의들 모두 사회에 감수성민감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작 감수성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반적인 사회의 구조에 대한 논의를 조금 후순위로 두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 만큼은 소위 인정투쟁이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감수성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적 회복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제는 이 부분, , 관계적 회복이라는 담론을 탈시설논쟁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최종적인 핵심이다.

 

 

  이러한 회복은 곧 정신적 장애인이 본인의 삶의 역량을 스스로 키우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회복이 왜 탈시설논의에서 중요할까? 첫째로, 이러한 회복적 맥락이 없다면, 시설을 폐쇄 하는 것은 시설로부터 자유를 줄 테니 스스로 살아남아 보라.“ 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개인의 관점에서 본인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하고, 국가의 관점에서 시설병으로 인한 무기력한 노동력을 방지하거나 복지비용을 감축학기 위해 시설을 폐쇄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는 가족의 돌봄과 지역사회 자원의 공백을 고려하지 않은 시혜적인 차원의 조치는 결국 계산적인 사회적 선택으로 인해 장애 당사자를 시설에서 내뱉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둘째로, 이러한 회복적 맥락이 없다면, 시설을 소분화 하거나 시설의 인권침해에 대한 처벌규정과 관리방식을 시대에 맞게 개선하는 것은 곧 우리는 조치를 다 했는데 그럼에도 학대나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시설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거나 특정한 종사자와 거주자 간 발생한 개별적 사례일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애초에 인권침해 등 위계로 인한 폭력은 시설 문화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기도 한데, 본질적인 원인에 집중하지 않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방식으로 시설 내 위계와 폭력을 정당화 하는 것이 옳을까.

  셋째로, 이러한 회복적 맥락이 없다면, 시설의 장애인이 지역사회와 통합될 때 이들에 대한 온정과 이해라는 현 시대에 너무나도 어려운 가치를 사회 구성원에게 강조하는 것과 같다. 당장 주체성과 개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기계처럼 항상 피곤하게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에게 장애인 자립장애인 통합’, ‘인권 감수성이란 곧 이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당장 많은 사람들은 꼭 빈곤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들은 자립과 통합, 감수성이라는 가치를 통해 무언가를 보장 받은 것이 미비하다. 요즘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듣는 데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은 사회에 대한 불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지원할 테니, 시혜와 도덕심을 가지는 마음으로 저러한 가치를 발휘하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다. 혹자는 인본을 말하지만, 애초에 인본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나 이외의 타인의 인본을 수긍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제는 본인의 할 일만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해 사람들이 많은 사회적 논의를 포기하거나 정치권에 대리한 상태이다. 이러한 분업화 된 사회에서 공통된 사회적 의제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이 장애인 복지를 포함한 사회복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사회복지 쪽에서는 크게 논의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https://www.dementi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50

 

  이러한 세 가지 맥락에서 회복적 맥락이 왜 탈시설 논의에 필요한지 알아보았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곧 장애인 당사자의 회복을 넘어 사회 전체의 회복을 의미한다. 만약 저 세 가지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지금처럼 탈시설을 논쟁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사진이 깨졌지만, 저 사진은 강남 뒤편에 있는 판자촌이다. 좋은 차가 지나다니고, 각종 사람들이 트렌드 한 레스토랑에 모여 수 없이 사진을 찍어 올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강남의 뒤편에는 저러한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공간을 모른다. 정확히는 알 필요가 없다.” 이곳은 빈 공간이다. 존재는 하지만 저기에 누가 사는지,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이다. , 만약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이 시설을 나와 살아간다면, 혹은 개선 된 선진화 된 시설에서 살아간다면, 이들의 공간은 장애인권리협약에서 말하는 지역사회에 동등한 접근이 가능한 공간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특히 정신적 장애인의 경우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외출자체를 안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시설을 나오든 시설에서 살든 이들에 대한 관계망이 지역사회로 넓혀지지 않아, 사회 구성원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면 이것은 강남 뒤편의 판자촌과 다를 바가 없다. 시설에서는 벗어났지만, 결국 지역사회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재 탈시설 갈등이 가져다 줄 미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세 맥락을 통해 관계라는 회복가치를 넣어 탈시설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판자촌이나 시설이라는 공간이 관심선상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 ‘범죄사건이 보도되거나 선거철이 되면 무섭게도 사람들의 관심이 빈 공간에 쏠리게 된다. 언론에 사건이 보도되면 나도 모르게 가해자의 특성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망상을 동반하는 조현병을 이유로 약을 먹는 A씨가 술자리 중 지인의 말에 격분해 폭력을 가한 사건의 경우 우리는 자연스럽게 , A라는 사람이 정신상태가 안 좋아서 지인의 말을 왜곡해서 폭력을 행사했구나.”로 이해한다. 한때는 조현병 환자가 범죄를 저지른 수는 생각보다 현저히 낮아 조현병이 곧 범죄를 유발한다는 것은 그럴 듯한 생각에 불과하다는 주장들이 제기 되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보통 발달장애나 정신질환이 타인에 대한 위해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건강복지 법체계의 입원 규정이나 발달장애인 법체계의 의사결정 대리 규정은 일정 부분 사회방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돌발행동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사회복지법이 사회방위법으로 이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부분도 관계적인 것에 해답이 있을 수 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적어도 범죄사건이 보도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어떤지 부터 찾지는 않을 것이다. 우울과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자기이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정신질환자의 역기능적 소통이 불안과 위험의식에서 나오는 하나의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실패를 겪었다. 젠더 갈등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누구는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한 병리현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젠더 인정투쟁이라고 표현하는데 어쨌든 이 갈등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특정 한 사람의 정체성, , 성별이나 연령, 건강상태를 이유로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떨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공동체와 관계의 회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탈시설논쟁 역시 장애인만을 담는 것이 아닌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야 할 것이다.

 

<'시설'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 관계>

 

 

  그래서 결국 이 글의 핵심이자 결론은 이렇다. 시설이라는 것을 사회문화 현상으로 이해하자는 것, 그리고 이에 맞게 탈시설에 대한 해답을 인권의 관점에서만 보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야 탈시설 논쟁이 제자리를 머물지 않고 다음 논의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신요양시설을 예로 들면, 시설은 여러 가지로 구성된 사회문화적 복합물이다. 의료 및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개인의 기능이 저하되었다는 의료적 판단이 내려지면, 이를 근거로 정신건강 법체계가 시설 수용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법체계와 제도는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과 태도가 만들어 내며, 이러한 결과로 감시와 대형생활이 용이한 건물형태를 가지고 시설물이 지어진다. 이 시설의 운영은 효율이라는 원리에 따라 획일적이고 위계적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규범,관습,제도,이론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해 시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설문화라는 하나의 기계를 움직이는 엔진의 메커니즘과도 같다. 그러니 탈시설은 이러한 요소 간 상호작용을 해체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탈시설은 단순하게 장애인의 권리, 장애인 돌봄 부양자의 권리, 사회적인 수용수준만으로는 논쟁해서 답이 나올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동체 '탈시설' 실현에 대한 시도와 방안: 이탈리아 협동조합, 그리고 천주의성요한 병원의 사례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이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 글의 내용에 대해 이게 현실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답변만이 남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과 한 정신병동의 사례와 함께 탈시설논의에서 말하는 마지막 의문, , ‘탈시설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탈시설이 공간적 전환을 뜻한다면 그 공간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이탈리아 협동조합 사례로 본 '탈시설'>

 

 

  사실 이탈리아는 신기한 국가이다. ‘정신병동이 거의 폐쇄한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남부와 북부는 복지 인프라 차이가 나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당장 정신병동에 입원수가가 많은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꽤 신기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바자리아라는 정신의학전문의가 정신병동 대신 지역의 병원과 돌봄 서비스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을 목표로 사회운동을 한 것에서 기원했는데, 이후 이러한 정신에서 제정 된 바자리아 법이 시행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당시 사회 분위기가 ‘68혁명이후라서 다양한 사회적 체제 개혁이 요구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비관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사실 비자리아 법 시행 이후 꽤 많은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작용은 우리나라 탈시설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장애인을 병원에서 내보냈는데, 정작 지원체계가 없어 바자리아 법이 말하는 지역사회 중심의 치료와 지원(돌봄)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법으로 인해 정신장애인들은 꽤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된 것이다. 이처럼 법만을 제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장 한강에서 담배 피지 말라는 것을 법령을 근거로 여기저기 써서 달아 두어도 필 사람은 피고, 그걸 보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 ‘차별금지법때도 느낀 것이지만 법은 개선되어도 사람들의 규범과 태도가 같이 개선되지 않으면, 그것은 역기능적 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아마 바자리아 법 사례는 시설을 사회문화적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때의 결과를 시사해 주는 듯하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이탈리아가 극복한 방식 중 하나가 협동조합이다. ‘탈시설이 시설을 폐쇄하든, 시설을 개선하든 달라 보이지만 결국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꼭 탈시설을 시설과 지역사회 간의 공간적 전환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3의 공간을 만들어 시설과 이 공간 간의 공간적 전환을 생각해 보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 제3의 공간이 사회적 경제이다. 위에서 말한 시설문화라는 장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법, 제도, 규범, 이론 등을 바꿔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요소들이 개선된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반복적인 설명이 필요하고, 느린 속도로 동작을 수행하는 정신적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해 사정(Assesment)을 해서 장애인이 원하는 강도와 직무에 맞는 업무를 배정해 주고 이에 맞는 임금도 평균이상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업무를 할 때는 비장애인인 케어워커와 함께 하며, 이들은 업무의 도움 보다는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업무의 완성도를 점검하고, 업무를 할 때 실수대처 등 사회기술 훈련을 돕는다. , 는 곧 시설로부터 격리가 아닌 자유와 통합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며, 케어워커는 장애인의 업무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권리중심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규범과 사람중심노동을 실현하는 일종의 환경에서 장애인은 일방적으로 관계기술을 전달 받는 것이 아닌, 본인이 어떤 사람이고 본인은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은지 등의 본인만의 관계기술을 훈련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역량과 관계망을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지역사회는 협동조합의 판로를 제공하며,  이렇게 훈련된 장애인은 지역사회의 박물관 등 다양한 방면으로 취업한다. 

 

<주윤정,2019,"탈시설 운동과 사람중심 운동>

 

  그리고 이러한 협동조합은 거주시설을 함께 운영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진을 참고해 보자. 침대와 책장 등 개인의 공간이 확실하다. 공동작업장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소위 말하는 잘 사는 집의 방 중 하나라고 여길 것이다. 공동휴게실은 창문 없는 공장이 아닌 넓은 창문과 충분한 크기의 다양한 공간특성을 가지고 있다.

  꼭 지역사회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처음에 소개한 탈시설논쟁은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탈리아가 이런 수준으로 협동조합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국교가 가톨릭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혜의 문화가 잡혀 있어 협동조합 생산물의 판로나 수입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고, 교회가 건물을 개방하거나 토지 임대료를 지원해주면서 교구를 배급해 주는 경우도 많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도 이러한 형태의 협동조합을 제주도에 운영하고 있고, 최근 들어 지역사회 복지가 각광 받으면서 사회적 경제와 한국교회의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써 커뮤니티 비즈니스 담론이 활성화 되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저러한 형태의 3의 공간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48084.html

 

  위의 이탈리아 협동조합은 장애인 탈시설에서 탈시설이 어떤 공간으로의 탈시설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공간이 무엇이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탈시설에서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는 탈시설이 무엇인지 말해보려고 한다. 사진은 광주 천주의성요한 정신병동의 보호소 모습이다. 아마 어색한 것이 있을 텐데, 무엇이 어색한가? 보호소이지만 침대이 없다는 점이 어색한 부분이다. 최근 병동에서 끈으로 침대에 묶다가 환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사실 정신장애인의 특성상 증상이 올라와 돌발행동 등이 발생했을 때는 자연스럽게 끈으로 묶어왔었다. 말 그대로 정신병동이라는 시설이 강남 뒤편 판자촌처럼 빈 공간이라서 우리가 지각을 못했을 뿐이다. 심지어 천주의성요한 병원 정신의학과 이요한 전문의도 환자가 욕을 하고 폭력을 가하니 제압을 할 때 끈으로 묶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요한 전문의는 그 대신 안정화 치료를 선택했다.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원장을 지냈던 김성수 전문의도 재직 당시 820건의 응급입원에도 불구하고 강박률을 5% 유지했으며, 현재는 비강압치료 기술 개발을 하는 연구용역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강박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라고 말한다. 안전하고 인격적이며 트라우마를 최소화 하는 정신질환 치료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견은 공통점이 있다. 병동의 생김새와 입원 과정과 입원 생활의 구조가 환자가 의심과 오해를 사기 좋으며, 이는 곧 환자의 분노나 행동장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의성요한 병원의 경우 ''자로 된 병원 가운데에 환자들이 산책할 수 있는 정원넓은 생활공간을 위해 병상 수를 40개로 제한했다고 한다. 김성수 전문의는 일반으로 정신질환은 의료과학을 표방하므로 가두거나 주사를 놓는 즉각적 치료가 용이하지만 이럴 경우 치료가 6개월 늦어지며, 이때 발생하는 저항으로 인해 직원과 환자가 부상을 당한다며 격리와 강박은 비싸고, 폭력적이고, 해롭다.”고 말했다.

  길게 말했지만, 이 전문의들이 한 시도는 시설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탈시설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들은 단순히 병원의 규정을 새로 만들거나 직원교육을 새로 한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정신장애인의 돌발행동은 그들의 악의가 아닌 치료환경에서 오는 불안과 위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정신장애인의 특징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맞게 환경을 개선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신장애인을 대할 때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탈시설을 이야기 할 때, 특히 발달장애인의 탈시설의 경우 발달장애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말하는 돌발행동이 정신적 장애인의 소통방식인 반복 된 같은 말과 행동이 과해졌을 때 나오는 반응이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불안과 위협, 스트레스를 느꼈을 때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어렵다 보니 탈시설을 찬성하는 쪽은 격리를 해야 하는데, 그래도 관리를 하면 좀 괜찮다.”고 말하고, 반대하는 쪽은 격리를 해야 하는데, 왜 지역사회로 내보내는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논쟁에는 당사자는 없다. 왜냐하면 찬반 모두 정신적 장애인은 의사결정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공통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이들은 당사자 보다는 당사자의 가족을 우선으로 두고 논쟁을 하는데, 정작 양쪽 모두 필요할 때는 당사자가 원해서...”라는 말을 붙인다. 이들이 지식이 부족해서 이러한 모순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현재 탈시설을 찬성하고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 당사자의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탈시설 문제는 당사자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는 듯하다.

  앞선 두 전문의의 시도는 정신장애영역에 있어 관계지향적이라는 가치를 넣는 것과 같다. 시설은 격리와 분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치는 곧 탈시설의 가치와 같다. 현재 퀄리티라이츠라는 정신건강 영역에 인권과 회복 가치를 넣는 WHO의 프로젝트가 시행되고 있다. 이것은 이 글에서 말하는 회복가치 중심의 탈시설이 소수의 사례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리고 당사자가 본인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을 넘어 본인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조직하는 것이 당사자 관점 이후의 패러다임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탈시설논쟁 역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시설'과 '시설이 아닌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탈시설논쟁은 지금까지 장애인에 대한 개별적 특성의 이해 없이, 그리고 탈시설 이후 당사자가 마주할 공간에 대한 모색 없이 진행되어왔다는 점에서 실패한 논쟁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캥거루족’,‘히키코모리라는 표현을 쓰면서 스스로 세상 밖에 나가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고 실패와 좌절에 대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가 불렀다.”,“온실 속의 화초다.”라며 나무란다. 그런데 정작 장애인의 경우는 그냥 시설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탈시설은 당사자 개인이 중심이어야 한다. 돌봄 부담과 시설의 질, 장애인의 능력 역시 당연히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탈시설은 곧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바깥에서 스스로 경험을 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설은 곧 나를 알아가는 인간발달의 과정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설이란 뭘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시설과 시설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명의. 그런데 이 명의는 자유와 자기주도성, 책임감 등 참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 집인데 부모님의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부모님의 통금시간을 준수해야 하고, 형제와 같은 방을 쓴다면, , 당장 내가 원하는 생활이 아닌데도 이를 따라야 한다면 이것은 일까 시설일까?

 

  이 글에서는 지역사회를 비판했지만, 사실 정부나 지역사회는 나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경우 집 몇 채를 당사자 명의로 계약을 한 후 장애인 몇 명이 같이 생활하며 일상적인 지역생활자립 훈련을 하고 있다. 이때 자립생활센터의 활동지원사는 자립능력이 충분히 키워질 때 까지 지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상상해 보자. 활동지원사가 근무시간이 끝나면 이들은 바로 혼자가 된다. 실제로 이러다 장애인이 사고에 노출되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거주 당사자는 거주민 회의에서 본인이 원하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개선방안 등을 직접 발언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발달장애인의 경우 말이 느리고 질문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담당 활동지원사가 변우진님은 영화 보는 거 좋아시잖아요. 그렇죠?” 라며 대신 대답을 하는 경우도 있다. , 활동지원사끼리 영화보기 프로그램을 짰는데, 취소되면 당사자가 실망할까봐 계획이 확실해질 때 까지 변우진씨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혹은 조금 기분이 안 좋을 때는 활동지원사가 화를 내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자립생활주택인가 시설인가?

 

  요즘 시설들이 정말 많이 생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또 상상해 보자. 장애유형과 적성을 고려해 원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비장애인 평균 임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임금을 받는 것, 나의 집과 구조가 똑같이 설계된 시설에서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집에서 하던 생활습관과 루틴을 연습하는 것. 이것은 시설인데 시설로 부르는 게 맞을까? 시설이 아닌 것일까?

 


 

나가며: '시설'을 넘어 '집으로 가는 길',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

 

  이러한 물음들이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할 수 있다. 시설은 분리와 배제, 환멸과 거부를 의미한다. 적어도 환대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탈시설은 이러한 시설의 속성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의 치매노인 마을은 누가 말하지 않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프로방스로 착각할 정도이다. 치매노인이 운영하는 느린 가게, 혹은 요양시설 앞 아름다운 정원 등 이러한 요소를 통해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생활권에 조금이라도 들어와 접촉할 수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시설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것을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진정한 의미의 탈시설 아이디어는 사회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이미 열려 있다. 꿈과 희망 없이 쳇바퀴 돌리듯 살아가는 우리의 삶 역시 어떻게 보면 '시설'과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탈시설이란 곧 공동체로의 귀환이자 새로운 연대의 조직을 의미한다. 

 

 

<장애인 복지 내 분절적 거버넌스의 형태>

 

이러한 길을 위한 과제는 여전히 많다. 우선 행정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부와 정보제공의 역할을 수행하는 지방정부, 수동적인 이용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애당사자 간의 분절적인 거버넌스를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칸막이거버넌스에서는 정부는 장애인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런 배경에서 활동지원 시간을 줄이거나 자립생활주택 거주 기간을 줄이라는 정부권고가 계속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말했듯 탈시설은 곧 삶을 살아가는 역량의 강화와 사회적 관계를 주도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장애당사자의 자력화를 의미한다. 정신적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반쪽 투표권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겠다. 무엇보다 사회복지 분야의 각성도 요구된다. 사회복지는 시설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지, 사회복지가 규정하는 돌발행동이라는 것을 문제중심으로 해결하기보다 당사자와의 어떠한 소통에서 발생한 불합치 신호로 볼 수는 없을지, 사회복지가 자본과 권력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중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