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시작: 2024.08.01. 12:00
작성 끝: 2024. 08.31. 23:00
분량: 12p. (퇴고처리 x)
<목차>
Ⅰ. 시작
Ⅱ. 사회복지에서의 이론 _『사회복지실천기술론』, 길귀숙 외 공저.
Ⅲ. 장애인의 지역사회자립과 위험감수권_ 『장애인복지론: Inclusive society를 위한 상상』, 김용득 저
Ⅳ.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및 관점에 대해_ <우리들의 블루스>, 2020 방영
Ⅴ. 장애인 복지의 미래 가능성에 대해_ 『인권과 대안을 위한 정신건강사회복지론』, 이용표 외 저
Ⅰ. 시작
우연찮게 친구 한 명이 1일 봉사를 제안해서 장애인시설인 양천해누리복지관에서 봉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자폐 및 발달장애 등 정신적 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을 위한 지역탐방프로그램을 보조하는 봉사였다.
아무래도 고령화 시대이다 보니 사회복지의 꽃, 혹은 사회복지의 끝은 노인복지라고 배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생애주기 관점의 복지보다 기능 중심의 복지에 더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이러한 선호와 함께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레 절단과 제약이라는 경험이 어떻게 소외로써 시회에서 구현되는지에 관심이 생겼고, 이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장애인 복지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퀴어부터 시작해 정상화, 탈시설, 상품성 논리, 사회적 역할의 가치화, 사회통합과 같은 이론을 조금씩 챙기면서 접해왔지만 막상 장애인 복지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봉사 등을 하지는 않았었다.
아무래도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 옆에 성 베드로 학교라는 발달장애인 교육시설이 붙어 있는데, 가끔 발달장애인이 길을 묻거나 대화를 걸 때 그들의 어눌한 말투나 행동의 의미를 해석하는 게 번거롭게 느껴졌던 것, 체력이 떨어질 때는 그들과 대화하는 게 지쳐 적당히 못 본 척을 했던 것, 아르바이트를 할 때 신체 장애인들이 매장 밖에서 물건을 사게 도와달라는 요청이 귀찮게 느껴졌던 것,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머리만 꽃밭인 채 장애인과의 접촉을 귀찮은 무언가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든 경험으로 증명해야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기도 했고, 또 여러 교수님과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앞길을 정하는 것은 대단한 생각이 아닌 우연찮은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애정하는지에 달려있다는 점을 실감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편견을 부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접촉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봉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Ⅱ. 사회복지에서 이론이란 _『사회복지실천기술론』, 길귀숙 외 공저.

이번에 봉사로써 보조한 지역탐방프로그램의 목적은 정신적 장애 청소년들이 식당이나 마트, 문화공간 등의 지역사회 내 인프라를 스스로 체험하도록 지원함으로써 이 과정에서 장애 청소년들이 ‘자립’을 위한 대인관계 및 소통역량 등의 사회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무래도 봉사는 이론을 실천에 적용하는 연습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기 전에 현재 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사무국장으로 계시는 교수님께 메일을 드려 조언을 얻기도 하고, 봉사 가는 기관의 사업 등을 미리 검색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전공서를 다시 보고 배운 내용을 복기해 보는 것이었다.
봉사가 끝나고 소감으로 실천, 실기론이 아닌 실전론, 실전기술론을 배운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론을 실전에 접목하는 것은 정말 어렵게 다가왔다. 이 두 과목은 사회복지의 근간이라고 불리는데, 이 과목의 핵심은 결국 의사소통의 방식과 태도이다. 그런데 지능장애, 발달장애, 자폐를 가진 네 명의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시간이 급해서 통성명조차 하지 못하고 봉사를 시작하니 아이들에게 이름이나 무엇을 좋아하는지 간단하게나마 소통을 하며 라포를 형성할 기회가 없었다. 막상 시작해 보니 먼저 말을 붙이고 그들을 궁금해하며 소통을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왜 교수님들이 그렇게 공감과 경청을 강조했는지, 그리고 실천론과 실기론을 외우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봉사가 끝나고 전공서를 다시 보니 결국 당사자를 위한 소통 방법을 뿌리로 두고 이를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하다 보면 그 고민지점들이 자연스레 이론으로 따라오는 것 같았다.
아무튼 괜히 나서면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봉사를 지도하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무래도 행동적으로 성장단계를 거치고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나가서 어떤 장소를 체험하는 것보다는 복지관에 모이고, 장소를 정하고, 밖으로 나가기까지 일련의 사회기술 교육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듯 보였다.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정해진 장소까지 어떻게 이동할 수 있을지 핸드폰으로 알아보기’와 같은 과제를 부여하고, 아이들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정한 행동 등을 교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지역사회 자원을 이용하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하고, 웬만큼 사회기술이 훈련되어 있는 아이에게는 버스 시간표를 참고해 언제 복지관에서 나가야 하는지 좀 더 심화적인 과제를 통해 자립 적응도를 높이는 전략을 사용되었다. 한편, 여느 청소년이 그렇듯 과제 중 선생님의 훈육방식을 모방해 다른 아이를 제어하려는 행동을 보이거나, 일종의 반발을 보이는 아이에게는 행동수정 기법을 사용하시곤 했다.
이러한 방식은 지적하는 방식이 아닌, 질문과 소통을 통해 아이 스스로가 부정적 행동을 인지해 그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타인에게 그 의미를 전달할 때는 어떤 표현이 적절한지 스스로 고민해 답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들이 압박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노래를 틀어 시간을 체크하는 선생님의 노하우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부여된 과제는 같지만 자폐, 발달장애, 지능장애에 따른 차이와 아이들의 개별적인 특성에 맞게 과제의 진행방식과 목적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굳이 힘들게 실천기법을 이론으로 배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만약 이론을 배우지 않았다면, 현장에 어떤 실천기법이 적용되고 있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Ⅲ. 장애인의 지역사회자립과 위험감수권_ 『장애인복지론: inclusive society를 위한 상상』, 김용득 저
- 저자
- 김용득
- 출판
- EM
- 출판일
- 2019.04.30
장애인 복지를 다루는 전공서의 공통주제는 대체로 장애의 유형과 원리, 장애인 정책(법제)의 구성과 변화, 장애 패러다임의 변화, 장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장애학과 사회복지실천에 대한 담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장애인 복지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때,『장애인복지 : Inclusive Society를 위한 상상(김용득 저)』라는 전공서가 봉사를 할 대 가장 도움이 되었다. 보통 대부분의 전공서는 앞서 말한 공통주제에 따른 이론 및 학술적 내용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반면, 이 책은 여러 실천적 사례 등을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책의 차별성은 기본적인 이론뿐만 아니라 당사자와 사회복지 현장 실무자 간 관점의 차이를 균형 있게 다룸으로써 실천과 이론 사이의 괴리감을 줄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데 기여한다. 이렇게 균형적인 시각으로 책이 쓰일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가 장애인 복지 실천 현장가로 근무했던 경력과 함께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와 학계 활동을 하며 얻은 거시적인 고민이 힘을 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했을 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장애인의 ‘위험 감수권’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책에서는 이 내용을 발달장애인이 유원지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를 가정한 일상적인 사례로 풀어 설명해 가벼운 내용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탈시설’과 같은 장애인 자립과 같은 논의는 정상화나 권력이론처럼 복잡하면서도 때로는 분쟁적인 담론을 포함하는 듯 보이지만, 이러한 논의의 본질은 장애인이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우리는 직장이나 학교와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서조차 교통사고나 범죄 등의 위험에 노출되며 살아간다. 물론 일상에서 극단적인 위험이 벌어질 확률은 지극히 낮은 편이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가 평소에 위험을 신경 쓰며 살아가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피해보상과 같은 사회적 보상과 위험을 예방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둘째로, 이러한 안전망 혹은 보상대책을 활용하여 위험상황을 예측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개인의 대처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의 대처능력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은 개인이 본인의 대처능력을 신뢰하지 못할 시 소위 말하는 역기능적 행동양식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히키코모리 등이 보이는 자발적인 은둔·고립이나, 과도한 통금이나 과한 보호로 인해 사회적 관계에 있어 소극적이거나 피해망상적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통 시설수용 여부에 대한 논의는 장애인의 노동성과 시설 인프라 비용 등 경제논리로 이해될 때가 많다. 하지만 진정한 시설 논의의 본질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이유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본질적으로 우리는 장애인의 대처능력에 대한 신뢰를 공유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봉사를 했을 때 복지관 안에서 벗어나 막상 복지관 밖으로 나오니 체험 장소인 다이소 매장까지 이동하고, 다시 복지관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바깥의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 위험요소로 보였다. 버스 정류장까지 갈 때 몇 아이가 잠깐 자전거 도로로 이동할 때는 괜히 사고가 날 것 같았고, 버스 안에서 따로 떨어져서 앉을 때는 제 때 아이들이 못 내릴까 봐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이소 매장이 큰 편은 아니라서 아이들이 사람들과 충돌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도역할을 맡은 것에 비해 거의 감시일 정도로 아이들에게 밀착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돌이켜 보면 비록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기는 하나 이들의 행동이 비장애인들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한 아이가 너무 길을 앞서나가서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했는데, 이미 길을 알고 매장에 먼저 도착해 있기도 했고 꼭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길을 터주거나 이탈 없이 매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고르기도 했다. 물론 셀프 계산대를 이용하는 것 등 도움이 필요한 부분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절차만 도와준다면 아이들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단독행동이 충분히 가능한 아이는 점원에게 계산을 요청해 포인트 적립이나 카드 혜택을 챙기면서 스스로 계산을 끝마치기도 했다.
또, 복지관으로 돌아올 때 애들이 조금 이르게 버스에서 내리길래 선생님이나 친구나 나나 한 명이 실수로 벨을 눌러 일찍 내린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버스 편도 상 그 아이의 판단대로 조금 일찍 내리는 게 맞았다. 기본적으로 지역탐방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자립을 돕는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이라지만 사실상 장애인의 대처능력을 믿지 않는 한 또 다른 보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 당일에 나도 집 근처 다이소를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왠지 카드가 긁히지 않아 점원이 도와주기도 했고, 운동으로 수영을 하다 괜히 사람하고 부딪혀 시비가 붙은 일이 있기도 했다. 비장애인인 나도 일상에서는 여러 실수를 반복한다. 대체로 장애인들에게는 이러한 실수를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복지는 실수를 예방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보니 이들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조차도 ‘훈육’과 ‘교정’의 목표가 된다. 이는 아마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특히 정신적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달리 실수상황을 인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일반적인 사회의 규범과 달라 자칫하면 돌발행동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감수하고 대처할 권리를 장애인들이 가지지 못한다면, 그리고 훈련하지 못한다면, 장애인 복지는 ‘자기 결정권’이 아닌 ‘자기 검열권’에 가까운 서비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 상황을 걱정해 위험요소를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장애인의 경험을 막는 것이 아닌 장애인들이 어떠한 경험에서 현실적으로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본인만의 노하우로 애쓰게끔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설에서 벗어나 장애인들이 자립을 한다는 것은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감시나 획일화 등 ‘시설문화’ 때문에 지원받지 못하는 교육과 재활 등의 보장을 위해 수용적 환경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시설을 없애는 것이 아닌 시설의 문화와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시설을 소규모 화하고, 시설 이용인 개인의 삶을 존중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개인적 장소를 보장하는 인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곧 탈시설이다. 협의의 개념으로서 탈시설이란 시설의 존재 자체를 폐쇄하고 당사자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의 보편적인 주택에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편의상 개념을 나누었지만 장애인 당사자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두 개념은 공통점을 보인다. 시설 환경을 개선하든 시설을 없애든 결국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행동양식에 대한 신뢰이다. 만약 이 점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장애인의 지역사회자립은 곧 복지관과 같은 기능 재활 중심의 시설을 순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지역사회 자립이나 자기 결정권권을 말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직까지는 복지관이나 시설은 행동양식을 교육시키는 곳인 것 같다. 이러한 장소에서는 장애인 당사자 개인의 방식에 맞지 않더라도 정답이 정해진 하나의 매뉴얼을 통해 사회기술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사실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할 수 없듯이 이는 오히려 장애인의 위기대처능력을 몇 가지의 방법으로 한정 짓는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성격과 달리 특정 사건 혹은 유전 등을 통해 굳혀진 변하지 않는 속성을 기질이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험 감수권을 통한 장애인의 자립능력 계발이 중요하다.
Ⅳ.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및 관점에 대해_ <우리들의 블루스>, 2020 방영
- 시간
- 토, 일 오후 9:10 (2022-04-09~)
- 출연
- 이병헌, 신민아, 김혜자, 차승원, 이정은, 엄정화, 한지민, 김우빈, 고두심, 기소유, 박지환, 최영준, 노윤서, 배현성
- 채널
- tvN
인상 깊게 본 드라마가 있다고 하면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를 꼽는다. 제주도에서의 일상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드라마인데, 청소년 미혼모, 기러기 아빠, 지방풍습에 의한 가족주의적 희생, 현대인의 정신건강과 사람을 통한 치유 등 드라마에서 다루는 주제 하나하나가 일상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것들이 많다. 이때, 드라마에서 다운증후군을 가진 장애인 언니인 ‘영희’를 가족으로 둔 ‘영옥’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예전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보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봉사를 다녀온 후로 다시 보니 이전과 다르게 느껴진 감상이 있어 기록으로 남긴다.
https://youtu.be/tCcJ4 p3 aYIU? si=vG2 ykN5 jBnHVvB_9
작가가 장애인에 대해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장면은 현실적으로 잘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장면은 시설과 같은 특정한 보호 공간 밖에서의 장애인의 일상에 대해 짧게나마 보여주고 있다. 우선 영상을 보면 앞의 식탁에서 아이가 놀리는 것을 보고 장애인인 영희가 하지 말라고 정확히 의사표현을 하지만 이러한 의사표현을 보고 아이는 ‘바보’라며 놀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영옥은 아이의 부모에게 장애인을 대하는 예절 교육을 시킬 것을 당부하며 자리를 옮겨 앉아 앞의 아이와 영희가 서로 못 보도록 막는다. 이후 아이의 가족과 영옥의 일행이 작은 마찰을 빚은 뒤 영옥이 주변에 사과를 하며 장면이 끝난다.
이러한 장면을 보았을 때 어떤 사람은 기본적인 인권의식에서 나오는 분노를 느꼈을지 모른다. 혹은 장애인에 대한 각자의 경험은 충분히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장애인이라는 대상을 너무 선하게 묘사해 편파적으로 연출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 지점은 영희의 의사표현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 영희라는 인물은 스스로 육지에서 제주도까지 영옥을 찾아오고 주민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스스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기도 하며 동생 영옥의 애인에게 영옥에 대한 조언도 해주는 독립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작가의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작가는 전체적으로 영희와 같은 장애인들도 충분히 감정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장애학을 관심 있게 접한 사람이라면 이 영상에서 영희가 차별을 겪는 모습 보다 영희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하지 마라”라며 명확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모습을 더 주목해서 보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의 감정과 의사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이는 소위 말하는 성숙과 자립능력의 지표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즉, 위에서 말한 위험 감수권의 핵심은 사회가 장애인 당사자를 의사표현과 감정표현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보통 장애인은 보호와 격리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서 그런지 이들에 대한 이해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시설 바깥의 경험에 대해 장애인이 이해는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에 특정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조차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 봉사를 경험하기 전에는 나 역시도 장애인의 표현에 대해 크게 신뢰를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딱히 장애인 복지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장애인 특유의 “어색한 표현(사회관점으로 보았을 때)“은 어떠한 경험을 대처하는 위험 감수권을 수행하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애인 복지의 미래가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에 있다면,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의 위험 감수권을 인정해 줘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적 관점에서 지역사회 자립이든 커뮤니티 케어든 의도는 좋지만 결국 사회에서 장애인을 분리하는 또 다른 명분을 나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보았다. 결국 굳어있는 시각이나 사고를 바꾸는 것에서 오는 어려움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봉사에서 만난 장애 청소년들은 나의 생각과 달리 “일반적인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느 청소년들이 그렇듯 약간의 반항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면 내가 웃는 모습을 따라서 살짝 웃어 보기도 했다. 물론 훈련과 교육이 충분히 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지만, 어떠한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서 장애인이 표현하는 호감이나 불편함이 인정받는 것은 꽤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떤 아이는 어떻게 보면 고집이 강하고, 어떻게 보면 자기주장이 강했었다. 내가 “저번에는 지역탐방으로 어디 다녀왔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 아이는 말하기 싫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제스처를 보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사람을 무시하는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에 바로 교육을 해서 교정을 해야 한다. 실제로 그 아이는 이후에 내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자 나를 만만하게 봐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지도를 잘 따르지 않았고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 간식 시간 때 나의 간식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확 가로챘다. 아마 친구도 약간 당황했던 것을 보면 그때까지는 흔치 않았던 일인 것 같던데 위의 맥락에서 나온 행동이 맞지 않나 싶다. “저 사람은 내가 마음대로 해도 따로 터치를 하지 않으니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누군가는 악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적인 계산에서 도출되는 사고과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발달장애인을 고용해 카페를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하는 한 점주도 한 발달장애인 직원이 이제 부매니저나 매니저로 직급을 올려달라는 ‘욕심’을 보인 것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들을 나와 동일한 인간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니, 이를 이론과 실천에 잘 적용하면 돌봄을 벗어난 지원 중심의 복지(커뮤니티 케어)가 환상이 아닌 장애인 복지의 미래를 충분히 담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희망을 가졌다고 말은 했지만 당연히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지역사회 자립을 말한다고 해서 대책 없는 “시설 밖 장애인”이 늘어가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에 재활 등의 이용 중심 기능의 시설은 충분히 있어야 한다. 또, 장애인 당사자의 가족 등 폭넓은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못한다면, 어떤 특정한 감수성이나 민감성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래의 쇼츠 영상에서 나온 영옥의 말이다.
https://youtube.com/shorts/-VOWQrwbYIo?si=p-EcoIRp89fvwEpX
"영희도 다 알아. 자길 지하철에 버리려고 했던 것도 다 안다고.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영희는 다 알아. 그래서 추운데도 저렇게 밖에 있는 거야. 자기가 내 눈앞에서 없어지면 내가 화를 덜 낼 줄 아니까. 지금 이 소리도 영희 다 듣고 있다고. 근데 나는 모른 척할 거야. 지금 내가 하는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믿을 거야.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하니까. 쟤를 시설로 보낼 때 내 마음이 편하니까.
아까 그런 사람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아? 제발 영희 같은 애를 낳아라, 아니면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거나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나 돼라. 억울해 왜 나한테 저런 언니가 있는지. 왜 부모님은 착하지도 않은 나한테 저런 애를 내버려 두고 가셨는지."
사회란 2인 이상이 모여 상호작용 하는 시공간을 말한다. 우리는 태어나고 나서 부모든 누구든 눈을 맞춘 대상으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정으로 대화를 했고, 이후 학교와 같은 공간에서는 나만의 표현을 넘어 말과 행동 등 타인의 표현방식을 이해하는 복합적인 사회기술을 익혀왔다. 최근에 TCI 검사를 받았는데, 내 기억이 시작되는 4세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른 것이 없다. 특히 사람을 대하는 습관이나 표현이 그렇다. “가면을 쓴다.”라는 말이 있듯이 여느 어른이던 뇌에 힘을 줘서 안에 어린아이를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는 유전이나 환경에 의해 바뀌지 않는 속성을 말해주는 기질이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령과 지능 등의 숫자적인 기준을 통해 일종의 기본적인 사회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곤 한다.
작중에서 영희의 정신연령은 7세 정도라고 나온다. 나이에 비해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영희는 주변 사람의 사진을 찍어서 그림을 그려줄 정도로 호감을 표시할 줄 알고, 영옥이 억울함을 토로할 때는 영옥의 기분을 생각해 추운 밖에 나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으로 감정을 다스리기도 한다. 영옥이 말했듯 영희는 과거 자신이 혼자 지하철에 남겨진 것은 곧 버려졌던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고 있다. 요즘은 아동과 청소년을 ‘성장 단계’에 있는 하나의 자립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 같다. 심지어 개나 고양이도 ‘반려’라는 용어를 붙여, 고지능이 아닌 경우더라도 ‘감정 지능’ 등을 사용해 인간과 기쁨과 슬픔을 교류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런데 왜 정신적 장애인의 경우는 예외일까.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장애인의 경우는 돌발행동이라는 타인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맨 위의 영상에서 영희가 의사표현을 했지만 이와 별개로 영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초점을 못 맞추는 일반인과 다른 외모, 부자연스러운 음성의 높낮이와 끝맺음, 어른인 몸에서 보이는 아이 같은 말과 행동은 소위 말하는 보통 사람과 다른 데에서 오는 이질감을 유발한다. 나 역시도 우리 학교 근처에서 만난 뇌병변 장애인이 선글라스를 벗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 사람의 지인 중에 시각장애인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다는 생각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에서 오는 이질감과 긴 시간 대화해야 하는 것에 짜증을 느낀 적이 있다.
물론 실제로 사회적인 기술을 훈련하지 못해 돌발행동으로 장애인이 피해를 끼치는 사례도 많다. 하지만 불안과 위협감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장애인이 보이는 이질감은 때로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위험요소”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영옥이 대변인으로서 영희의 의사표현을 사회적 표현에 맞게 해석해 갈등 중재에 나선다. 이러한 어쩔 수 없는 대리행위가 장애인 주변의 이해관계자들에게 있어 큰 피로요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위 쇼츠 영상에서 영옥이 한 대사는 영옥 본인에 대한 스스로의 울분을 담고 있다. 장애인 언니에게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을 영희의 심정을 외면하면서까지 자신이 비도덕적인 생각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자책감, 그리고 영옥 본인의 삶에 대한 상실감이 함께 담겨 있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가장 영희를 순수하게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오히려 영희를 놀렸던 아이였을 수도 있다. 영상의 아이는 7세 정도로 보이는데 아마 장애인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고 놀린 것이 맞을까 싶다. 이보다는 영희의 행동이 또래 아이들과 같아 보여 장난을 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영옥과 아이의 부모는 ‘장애인에 대한 예절’이라는 7세 정도의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부딪히는 것이 아닌, ‘한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근본적인 주제로 아이에게 어떠한 내용을 전달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싶다. 즉, 영옥과 아이의 부모가 영희와 아이 사이를 강제적으로 분리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장애인에게 미안한 행동을 했다.”가 아닌 “상대방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했다.”라는 사과표현을 하게끔 잘 유도를 하는 것이 장애인 회복관점에서의 교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보통 장애인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문제 해결을 위해 ‘접촉이론’을 인용하고는 한다. 말 그대로 미디어와 같은 간접경험, 혹은 대화와 같은 직접경험을 통해 접촉을 한다면 장애인 등 특정한 대상에 대한 시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다만, 당연하게도 접촉이 해답은 아니다. 누군가에 대한 접촉경험은 나의 편견을 확실히 못 박는 경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https://youtu.be/pGmGtQ3 eoos? si=3 d0 pXIzpOTKSfNgl
< 다큐시선: 우리는 조현병 당사자입니다.>_2015 방영.
장애인복지법상(시행령 제2조)의 분류를 따를 때, 정신적 장애인이란 ‘지적’,‘자폐’,‘정신’이라는 세 가지 스펙트럼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이때, 이 영상은 위에서 말한 지적, 혹은 자폐 스펙트럼의 장애가 아닌 조현병, 양극성 장애, 재발성 우울장애 등에 따른 감정조절, 행동, 사고기능의 약화로 인하여 사회생활 및 일상생활에 제약을 겪는 정신장애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이야기에 앞서 물론 정신장애에 대한 분류는 모호하기 때문에 정신발육에 따른 지적능력의 발달문제에서 발생하는 장애 역시 포함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발달장애인을 다루던 위의 내용과 느낌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현실인식을 깨부수고 장애인이 지역으로 나와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신만의 대처능력으로 삶을 결정해 나갈 수 있는가?’라는 이 글의 주제에 적합한 사례로써 정신장애 중 조현병 환자의 이야기를 다룸을 미리 밝힌다.
영상 시작부터 약 2분 30초까지를 보면, 조현병을 앓고 있는 ‘원세희’씨가 불안과 흥분으로 증상이 올라올 때 밖에 나가 주먹을 휘두르며 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앞서서 접촉이론은 편견을 확실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는데, 사실 이 영상을 처음 봤을 때, 원세희 씨의 모습에서 영희와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만약 내가 업주라면, “저는 약물로 증상을 관리하지만, 또, 저만의 방식으로 증상을 대처하고는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방식이 주먹을 휘두르거나 잠시 공간을 피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과연 내가 이 사람을 고용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오히려 영상의 4분 05초부터 나오는 사단법인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의 이정하 대표의 모습을 봤을 때, 상당히 주도적이고 리더십적인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이정하 씨가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지역사회에서 이들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장애인의 능력보다는 그들이 강하고 자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 영상의 약 8분 55초 부분에서부터 정신장애인 당사자주의 모델의 이상적인 사례로 꼽히는 ‘베델의 집’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장애인의 인간성에 대한 인식에 따라 장애인의 복지 서비스 환경이 결정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정신적 장애인의 경우 이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상은 판단력이 없고,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 충동적인 모습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에서 격리하고 수용(보호), 혹은 예방해야 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온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이러한 장애인의 인간상을 공유하는 사회나 비장애인 개개인에게 특정한 책임을 지게끔 해야 할까.
“더 이상 어떻게 착해”
위에서 쇼츠 영상 중 마지막에 김우빈(정준)이 착한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던 영옥에게 한 말이다. 뭔가 로맨스스러운 대사인 것은 맞지만, 저 대사는 분명 장애인 주변의 이해관계자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영옥은 극 중 전 남자친구들을 언급하며 그들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막상 영희를 보았을 때 다들 도망갔다고 말한다. 마치 ‘사슬에 묶인 것 같은’ 장애인 가족이 겪는 느낌은 연애나 결혼, 취미 등의 삶에서 오는 성취를 제약하는 충분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누구나 가진 현실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전국장애인연합 지하철 점거 영상을 보면, 누군가는 바쁘게 출퇴근을 하며 기계처럼 살아야 하고, 누군가는 끊임없는 야근과 업무에 치여 다른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예민하고 피곤하며, 누군가는 가족의 임종을 봐야 하는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처럼 사회학이나 경제학, 사회복지학을 배운 사회과학도가 아니라면 솔직히 장애인의 인권 등은 보통 사람들이 신경 쓰기 힘든 사회이다. 당장 개인의 삶조차 안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데, 장애인에 대한 보장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어려운 숙제와 같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내가 제시한 영상을 보고 장애인에 대한 불합리한 태도에 분노할 것이고, 누군가는 장애인 시설이나 장애학생통합교실 도입 찬반 토론을 지켜보며 본인의 생각을 점검하거나 장애아동청소년에게 소정의 후원을 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법과 제도의 영향은 있겠으나 이러한 사람들의 여론으로 인해 저상버스도입을 도입하거나 가게에 발달장애인이 물건을 사러 와도 아무렇지 않게 “어서 오세요.”라며 인사하는 등 장애인에 대한 인프라와 사람들의 태도가 발전했을 것이다.
집 근처 홈플러스에서 지게차를 모는 직원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보기도 했고, 편의점 직원이 발달장애인이 돈 계산을 실수할 때, 바로 잡아주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들이 비록 장애인을 직접 만나고 봉사하고 대화하는 것을 꺼릴 수는 있어도,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배제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장애인에 대한 현실인식이 더 나아지면 좋겠지만, 일상에서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해 나가는 움직임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기에는 이들의 삶 자체도 버겁고 책임질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충분히 착하다.”
Ⅴ. 장애인 복지의 미래 가능성에 대해_ 『인권과 대안을 위한 정신건강사회복지론』, 이용표 외 저

"불편한 현실의 인식을 토대로 정신장애인의 인권문제를 정리하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현실을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대안이 없으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새로운 비전은 당사자의 경험에서 출현할 것이다."
_저자 서문 중 일부 발췌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현실로부터 오는 장애 당사자의 인권 및 복지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당위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고민을 통해 실천적 대안을 요구할 수 있다. 이는 곧 ‘권익옹호’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불편한 현실의 인식을 토대로···”라는 소개로 시작되는『인권과 대안을 위한 정신건강사회복지론』은 사회복지학 전공서는 맞지만 장애학 교재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이 책은 좀 더 급진적이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정신보건의 역사와 체계, 그리고 정신보건 정책의 한계점, 정신장애의 이해와 다각적인 사정방법 등 기본적으로 다른 전공서와 함께 사회복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동시에 정신장애와 인권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전공서와 차별점을 보인다.
사실 정신적인 어떠한 장애나 질환을 생의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약물 등으로 치료하는 방식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 책을 포함한 사회과학적인 입장은 소위 정신의학과 같은 의료적 관점의 지식과 진단이 가진 “권력적 측면”에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장애를 의료적으로 규정했을 때 생기는 문제, 특히 인권적 문제에 집중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제기 할 수 있는 질문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의학적 지식은 발명되는 것인가?, 발견되는 것인가?”, “이러한 지식에서 이익(권력)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 “지식이 정한 ”정상“의 개념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한 ‘꼬리표’를 가지게 되는가?”, “사람의 행동과 경향을 결정하는 어떠한 원인을 측정해 진단적으로 판단하는 게 타당성이 있는가?”
다국적 제약자본과 의학적 지식 간의 결착관계, 효율성 논리에 따른 인구관리, 만연하게 등장하는 ADHD와 같은 “병명”의 등장과 같은 현상에 관심을 가졌다면 위의 질문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곧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따라서 조금 극단적이지만, 이 책의 핵심은 반정신의학과 ‘Mad studies라는 담론을 통해 지배적인 정신의학담론이 가진 사회적 통제 및 억압의 기제를 비판하는 데 있겠다.
이러한 핵심을 토대로 정신장애인 인권과 대안에 대한 서술이 진행되는 것이 책의 특징이다. 대안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위에서 계속 말한 현실적인 편견과 상황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설레면서도 굉장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과업이다. 이러한 과업의 핵심은 책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정신적인 고통과 절망, 그리고 정신의학이라는 이름으로 보살핌과 접촉이라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억압과 제도적 억압을 겪으며, 정신질환이라는 “딱지(Labelling)"가 붙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견딜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감각과 어떠한 희망의 척도를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대안적인 시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곧 사회과학을 ”아는 “ 사람들의 책무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양적, 실증주의적, 근거 기반의 연구들을 배제하는 반정신의학은 오히려 정신장애 당사자의 경험과 질적 근거들을 활용함으로써, 기존 정신의학의 전문적, 의료적 연구 형태 자체에도 저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 195 ‘의료적 모델 및 의료화에 대한 비판’ 밑에서 넷째 줄.)
그런 의미에서 책은 주관적 경험과 환자 중심 치료를 강조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연구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딱지가 붙은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척도란 무엇일까? 양적이면서도 실증주의적인 근거 기반의 연구들일까. 개인적으로 사회과학을 전공하면서 내가 가장 간과하면서도 가장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발전과 위기를 동시에 추동한 것이 실증주의라는 점이다. 반정신의학이나 Mad studies는 당사자의 경험을 핵심으로 삼는데, 이러한 담론이 양적인 실증주의를 따르는 것은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 ‘% 논리’를 우선으로 삼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당사자와 회복을 말하는 담론은 결국 정신의학에 대한 정치적 공격, 혹은 환원주의적 이해에 불과하다. 사회복지는 ‘대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이상적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물론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사회과학을 지배한 숫자와 효율을 통한 실증주의 및 과학주의는 사회과학의 존재 이유를 지워왔던 것 같다.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현실과 다른 시공간을 살아간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과업의 달성 정도를 나눠 떨어지게 측정하거나 시간적으로 제한한다는 것이 옳을까. 이러한 방식 내에서 이루어지는 클럽하우스나 회복중점사례관리사업은 당사자가 아닌 성과를 우선으로 둘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는 대안을 말하는 것을 현실을 넘어서려는 시도, 혹은 현실의 방법론으로 대안을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한 “패배”와 같다고 생각한다. 대안은 곧 현실과 동 떨어진 것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가 못 보던 어떤 한쪽을 개척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대안은 현실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사자 관점의 시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경험을 담은 질적인 연구를 통해 당사자의 삶의 맥락을 구체화해 기존의 양적인 실증주의 연구로 간과되었던 당사자의 삶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 효과적으로 기존의 의료적 관점을 비판할 수 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새로운 역할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책은 서술하는 데 있어 당사자주의와 당사자 관점의 회복을 주요한 이론적 근거로 삼고 있다.
아마 최근에 인문학적 사회학, 혹은 응답하는 사회학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그러니 개인적으로는 정신장애 역시 푸코의 권력담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부르디외의 이론으로 설명해 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갑자기 권익옹호를 말하다 책을 소개하니 관련이 없어 보이겠지만, 긴 책의 소개 안에 권익옹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모두 담았다. 권익옹호란 ‘자신 또는 누군가를 위해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관계에 있어 한쪽 편을 서서 권익을 옹호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현행 정신건강체계에서는 정신장애인 인권이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이러한 현상의 쟁점은 의료행위로 인한 정신장애인의 강제 입원, 장애인 본인의 동의 없이 특수치료를 받을 수 있는 구조, 사회보장에 있어 장애인 본인의 동의 없이 가족 등 타인의 대리 수급 행사가 가능한 구조, 부족한 재활시설과 예후 악화 시 이용 가능한 위기지원대책의 미흡함, 직업적 선택과 관련된 자격취득 제한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권익옹호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정신장애인은 자신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정보 및 방안을 접하고 자기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사회적으로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권익옹호의 방식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우선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학대신고를 접수해 조사에 착수하고 장애인들이 권익침해를 용이하게 진술하도록 지원해 법적 및 행정적 절차를 도울 수 있다. 또, 2019년 시작된 정신질환자 절차보조 시범사업처럼 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나 비영리 권익보호 법인이 장애인에게 정보전달 및 의사표현을 지원해 당사자가 치료 과정에 대한 정보를 이해해 의료진과 소통하도록 하며, 만약 증상이 심해져 판단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는 경우 미리 정신의료사전지시서 작성을 하도록 지원해 당사자의 의사결정을 보장한다. 또, 당사자의 의향에 따라 퇴원 후 정신재활시설 프로그램, 외래치료에의 참여, 그리고 동료지원과 자조모임을 통한 지역사회 동료 네트워크 구축을 지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당사자가 자기 주도적으로 치료에 참여하면서 정서적 지지와 공감을 받아 지역사회에서도 지속적인 치료 및 재활서비스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적 장애인의 경우는 가족의 지원(돌봄)으로부터 멀어져 무연고자가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공공후견사업 등을 통해 신상보호 및 재산상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
이렇듯 권익옹호의 취지는 장애 당사자가 비자의적으로 시설에 수용되는 것을 방지하고, 지역사회에서의 안정적 정착하는 것이다. 결국 권익옹호란 장애 당사자를 대신하여 일련의 조치를 취하거나, 혹은 장애인자립기관 등의 단체들이 공공정책에서 집단적 주장을 하며 장애 당사자의 자원획득을 대변하는 것까지 폭넓게 정의될 수 있다. 이때, 가장 핵심은 당사자의 의사결정이 꼭 최선의 이익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이다. 당사자의 결정의 독립성과 진정성, 그리고 이익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지원체계는 법적인 근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이다. 정신건강복지법상 보호의무자제도나 성년후견제도가 운영되고는 있지만, 공법과 민법 사이의 상충되는 법리에서 논리적 허점을 안고 있으며 성년후견제도 역시 법원의 심사절차와 같은 행정처리기간이 길다 보니 이용자가 적고, 법리상 피후견인에게 권리적 제약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인신보호법 역시 정신건강복지법의 구제절차와 중복될 수 없어 정신장애인이 인신구제절차를 받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법적인 문제 해결과 더불어 장애인 단체들은 절차보조서비스의 법제화, 그리고 사회보장 수급권의 대리수령 문제, 탈시설 로드맵, 동료 지원가 양성, 위기지원대책 마련 등을 주장하며, 22대 국회에 입법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권익옹호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걱정되는 부분은 정책 시행 이후 피드백과 관련된 부분이다. 사실 제도나 정책은 도입되는 것보다 어떻게 개선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선에 있어서는 정책을 수혜 받은 당사자들의 의견과 요구가 더욱 중요하다. 사실 정신건강복지법이나 장애인복지법 15조, 그리고 개인예산제 등 어떠한 법안이 도입되는 것은 금방이지만, 이렇게 시행되는 제도들이 자리를 잘 못 잡아서 사각지대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즉, 그림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정치적 민감성이 있는 편이기 때문에 어떠한 요구가 투입되고 이에 따른 정책과 제도가 산출되는 것은 원활하지만, ‘환류’, 즉 이에 대한 피드백이 굉장히 미비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너희가 원하는 것을 도입했으니 이제 됐다. “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 장애인의 경우 탈시설을 결정할 때 당사자보다는 이들을 둘러싼 가족 등의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더 반영되고 있는 것 같다. 당장 장애인 커뮤니티 내에서도 커뮤니티케어에 관한 찬반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다. 현재 장애인권단체들의 노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향후 어떠한 로드맵이 나오고 제도가 실시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핵심은 이렇게 실시되는 지역사회정착과 관련된 제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미비하다면, 아마 장애인에 대한 권익옹호는 본질적으로 멈춰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입법을 떠나서 많은 장애단체들이 사회적 여론을 개선하려고도 하지만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실 비장애인 대부분이 본인들의 삶도 못 챙기는 환경에서 어떠한 장애 민감성을 정치적 행위에서 발휘하기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다른 것 보다 ‘정신적 장애인 참정권’에 대한 제도적 개선에 먼저 집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통 병원과 같은 시설에 있는 정신질환자나 발달장애인의 경우는 정책 포스터를 읽거나 투표보조를 받는 데 있어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편이다. 이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비율이 낮다는 것은 곧 장애인 복지에 대한 정책적 피드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정책을 수혜 받지 않는 비장애인이 감수성을 가지고 대신 무언가를 요구하기에는 장애인 복지 자체가 너무 큰 의제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제는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한 당사자주의가 중요해진 시대이다. 그런데 당사자주의가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이전의 단계로 후퇴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가끔씩 간과한다. 사회는 단선적이지만은 않다. 당사자주의는 곧 당사자 개개인이 시혜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존재로 인정받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제는 장애인 스스로가 의사결정과 여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만약 이것이 설득력 있게 사회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차라리 관리받는 것이 나은 존재로서 장애인을 이해하는 관점이 재등장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독립적인 장애인의 여론과 의사결정을 위한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이 현재 장애인 권익옹호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