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사각지대
가끔씩 글과 생각이 안 나올 때면 주변에 토로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교수든 누구든 다들 “네 생각을 쓰라. 그게 중요하다”라고 조언을 해주곤 했었다. 그런데 이 말의 전제는 내 생각을 쓰되 설득력 있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 생각을 받쳐주는 이론적인 근거, 사례, 데이터, 문헌적 맥락이 없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생각에 불과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을 표현할 때는 자유로움보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번 3개월은 저 ‘책임감’이라는 부분에 대해 고민했던 한 학기였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NEET, 즉, 구직을 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종종 보고서를 작성하곤 했다. 그런데 NEET는 ‘생산인구의 감소’라는 특정한 논점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NEET의 결정요인이나 대책에 대한 자료가 여전히 사회경제적인 논리와 구직지원 프로그램 및 제도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의 동향은 NEET 문제 해결에 있어 큰 맹점을 지니고 있다. NEET 자체가 ‘비구직’ 청년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때, NEET에는 자발·비자발적 실직자를 포함해 고립·은둔과 같이 국가적으로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워 욕구를 알기 힘든 대상자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NEET 중 ‘현실회피형’ 유형에 속하는 청년들의 경우가 그렇다. 직장 내 따돌림, 혹은 생애주기 내 역기능을 겪어 고립·은둔 상태에 빠진 청년들의 구직문제는 학력, 연령, 고용상황에 따라 구직을 못하는 청년들의 구직문제와 결이 다르다. 이들의 NEET 결정요인은 사회경제적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구직지원 프로그램을 지원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 일차원적인 문제도 아니다.
즉, 현재 NEET의 실태와 대책의 자료는 ‘자발적 구직 희망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에 따라 NEET와 관련한 자료 역시 다양한 맥락을 담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니트 컴퍼니 같은 NEET를 위한 사이트에서 국민취업지원제도 등이 단기적이고, 성과중심적이라서 NEET 대상자의 니즈에 맞지 않았다는 참여자의 인터뷰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와 같은 인터뷰 자료를 포함해 몇몇 생애사적 연구 자료를 발견해서 다행이었지만, ‘욜로족 등 청년들의 자아실현 문화의 변화’,‘예술과 취미 등 무가치 노동의 노동성 인정’, ‘사회적 외상경험’ 등 다양한 맥락이 NEET 연구에 활용되지 못한다면 객관적인 정책 피드백과 후속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있겠다.
특히 종강 전에 ‘위기임신청소년’에 대해서 급히 알아볼 일이 있었는데, 따로 ‘위기임신청소년’이라는 대상자에 대한 정의와 실태를 정리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서 애를 먹기도 했다. 한부모 가족, 청소년 미혼모, 위기청소년 자료로 대략적인 실태나 문제 상황, 대상자의 욕구 등을 파악했지만 너무 소진이 큰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자료들은 대부분 청소년을 취약계층으로 보거나 교정의 대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맥락을 구성하기에 적절치 않아 보였다. 우연히 기아대책에서 위기임신청소년에 대한 데이터를 새로 조사해 보고서로 발간한 것을 알고, 자료를 구할 수 있었지만 자료가 하나라서 무언가를 해보기에는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부족한 데이터나 자료는 누군가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것 역시 ‘사각지대’에 해당되지 않을까.
대부분 문제에 심각성을 가지고 탐구하는 데 있어 주요한 선제조건은 ‘풍부한 자료’이다. 그런데 사회가 다각화되는데 사회복지영역은 여전히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일반적인 대상의 연구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사회과학이 과학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상식’을 이론적으로 검증하는 다양한 맥락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사회복지 분야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문제는 NEET, 위기임신청소년 등 데이터 사각지대에 있는 대상들의 후속 연구가 활발하지 않다면, 이러한 대상들을 방치했을 때 예상되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NEET만 하더라도 청년 시기의 NEET가 중년 NEET로 이어진다는 보고서와 장기적 NEET가 구직 활동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까지 단절하는 NEES 현상으로 번질 수 있다는 보고서가 제시된 지 약 3년이 지났지만 이와 관련한 후속 연구는 크게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종종 인터뷰에서 NEET든 위기임신청소년이든 “통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유형별 맞춤 접근이 필요하다”와 같은 진단을 내리곤 한다. 이러한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연구와 맥락발굴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을까? 적어도 전공자들이라면 현상을 진단하는 것 외에도 그 진단의 근거를 발굴해내는 활동을 해야 한다. 즉, 명확한 실태와 문제의 규모, 그리고 효과성을 검증할 수 없는 대상이나 문제의 학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현 한국 사회의 데이터 사각지대를 메우는 데 있어 중요하다. 적어도 우리가 비전공자들에게 어떤 대상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할 것이라면 그에 맞는 실태 자료와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공자들이 “공부하고 오세요.”,“교육이 필요합니다.”,“감수성을 길러야 합니다.” 이런 말만 하는 게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데이터 사각지대라는 것은 전공자들의 책임감을 요구한다. 적어도 우리가 사각지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의 쓸모
최근에 보던 유튜브 영상 대부분의 내용은 수학 난제들이었다. 칼-칼라이 추측, 푸앵카레 추측, 리만가설, 이휘소 박사의 소립자 이론 등 절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지만 어떤 이유인지 요즘 매일 보고 있다.
“과학자가 자연을 연구하는 이유는 쓸모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이 연구할 가치가 없다면 우리의 인생 또한 살 가치가 없을 것이다.” 조금 고민을 해봤는데, 푸앵카레가 남긴 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다. 사실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 영상을 볼 때, 댓글도 같이 본다. 이때 어떤 사람은 수학이 신의 언어라며 뭔가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 같은 신비로움을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일상을 수와 이론으로 설명한다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나 역시도 리만가설이라는 수학의 한 공식이 양자역학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설명하는 공식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은 정말 알 게 많고, 기대할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푸앵카레의 말의 의도에는 자연과학자들의 연구가 이 세상에 대한 감동과 기대를 가능케 해 우리의 삶에 대한 희망과 낙관을 준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회과학은 어떨까.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대담집 『사회학의 쓸모』를 읽었을 때, 한편으로는 굳이 사회학이 쓸모가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정확히는 사회과학의 독자적인 영역을 잃어가는 ‘사회과학의 위기’ 속에서 빅데이터나 사회심리학 등 타 학문과의 결합으로 사회과학이 생존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푸앵카레의 말을 빌려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목적이 사회과학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닌 비록 절망적이더라도 이 사회를 낙관(희망)할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가능성에 대한 비전 제시에 있을 수는 없을까?
사회과학은 때로는 이성적이고 비관적이다. 경제의 논리, 권력의 논리, 불평등의 논리 등 사람들이 이미 피부로 체감하는 절망이라는 부분을 잔인하게 이론적으로 검증해 나간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굳이 실험하고 검증하는 게 과학자의 역할인 것은 맞지만, 이러한 사회과학의 논리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과학을 기피하고는 한다.
일례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인간소외라는 두 개념은 교양적으로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때로는 전공자들이 “투쟁”이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것 같다. 혁명가로서 마르크스는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 대립과 갈등구도를 극복해 프롤레타리아의 지배와 해방을 말했지만, 과학자로서의 마르크스는 “계급”이라는 이론으로 인간소외의 시대에 절망하는 프롤레타리아들에게 혁명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희망”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굳이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좋든 싫든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필요하긴 하겠지만, 소수자든 누구든 어느 한 편의 논리를 대변해 상대방과의 대립에서 승리하기 위한 “쓸모”만으로 사회과학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쨌든 위와 같은 생각이 들었던 한 학기였다. 그래서 낙관 혹은 희망을 위한 사회과학은 어떤 것인지 조금 생각해 보니 “교양서”가 생각났다. 실제로 한창 경제학도 심리학도, 그리고 정치학도 소위 “스타 교수”들이 시사상식,재태크,마음 돌보기와 같은 컨셉으로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이론을 잘 재단해 다양한 교양서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사회과학은 “앞으로 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하다.”와 같은 비관적인 “진단”에 불과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래서 어쩌라고”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사회과학이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설서가 되어 주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러한 해설서를 통해 희망을 얻을 수도 있겠다. 소통학문으로써 사회과학이 기능하는 거 같아 진일보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런 교양서들 역시 결국에는 사회과학의 “쓸모”를 증명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 같다. 푸앵카레가 말하는 “아름다움”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낙관(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사회과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알튀셰르의 말처럼 비관적인 진단을 넘어서 사회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낙관(희망)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사회과학의 실현은 불가능한 이상일까.
STUDY: 사회갈등과 통합에서 발생하는 "감수성" 문제에 대한 논의
이번 학기에 유독 사회복지학 과목을 많이 수강해서 그런지 우연히 “사회갈등”과 관련된 다양한 현상이나 주제들을 접해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사회갈등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로써 “사회적 배제”, 혹은 “소외”에서 발생하는 편견과 통합에 대한 논의를 많이 접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학기를 지내면서 나름대로 선행연구도 조금씩 보고 생각도 해보니, 사회과학적인 ‘진단’의 성격을 가진 논의들이 사회갈등이나 사회통합 혹은 편견과 낙인(stigma)을 줄이는 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장애인, 노인, 여성 등에 대한 인식개선이나 편견 해소를 위한 인권교육, 할당제와 같은 “당사자 친화적인 정책적 노력 및 대책” 등이 시행되고는 있지만, 이러한 대책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나 사회적인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언제부터인지 최근부터 연령과 성별 등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정성과 차별 논란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회적 “반발”과 역차별 논쟁, 그리고 무임승차 논리를 사회경제적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사회과학이 잘 대답해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보았을 때, 갈등과 통합이라는 거대한 사회과학적 담론은 여전히 해결방안 위주의 논의에 머물러 있다. 답답하고, 진단적으로도 실패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이론과 철학적 담론으로 그들의 ‘소수자성’을 논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이제는 자리를 옮겨 새로운 논점에 대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자리를 옮겼다면 바로 보이는 논점은 ‘감수성’이다. 이러한 감수성 이야기의 핵심은 어떠한 대책이든 논의든 결국 사회가 받아들여야 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는 감수성 정도가 낮아 여성, 장애인, 퀴어 등의 소수자들에 대한 이해 및 수용이 낮다는 것이다. 사실 최근에 ‘인권 감수성’에 대해서 다양한 논박들이 나오고는 하지만, 이전에 비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과 방안 등이 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방안을 수용할 수 있는 정서적인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감수성 논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겠다.
다만 감수성 문제를 사회경제적 논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할당제를 생각해 보자. 경제 및 사회자본에 대한 자원 배분의 문제에 있어서 이에 반대하려는 입장은 감수성이 없는 “반발”일까. ‘반발’이라는 용어는 대결 구도를 내포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면 소수자에 대한 자원 분배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특정 집단이 기존 체제에 대한 수혜를 유지하고 싶거나 혹은 포기하기 싫어 저항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물론 권력 담론이나 사회심리학, 넓게 보면 행동 경제학적으로도 다양한 학술적 입장이 존재하겠지만, 어떠한 논리에 의해 어떠한 집단의 행동이나 말이 왜곡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세상의 다양한 논리 중 어떤 한 논리만이 부각 되는 것은 사회현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즉, 대결 구도의 논리는 사회갈등에 있어 ‘당사자성’을 특정 집단에 한정하고, 그 외의 집단을 대결 상대로 규정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임금과 일자리에 있어 ‘고용충격’이라는 하나의 사회적 사건은 성별 상관없이 청년 모두가 겪는 문제이다. 이때, 경직된 고용구조의 문제를 선행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통계와 사례 등 ‘양적’ 기준만으로 어떤 집단이 더 유불리 한지, 어떤 집단에 자원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 정해진다면, 감수성이든 사회적 이해든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갈등지점이 생기고, 이것이 한국 사회의 청년 갈등 문제로 불거졌다. 이것이 사회경제적 논리만으로 사회적 수용과 이해 정도를 논의했을 때의 한계점이다.
이러한 한계점은 진영을 나누는 어떠한 경계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만약 감수성이 상호이해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감수성이라는 것은 “도덕적 우월감”의 일종, 혹은 특정 집단에 속했을 때 발휘될 수 있는 하나의 선천적인 “재능”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있겠다. 실제로 최근 들어 사회갈등과 맞물려 ‘공감’과 같은 감정 행위의 지위는 점점 위축되어 갔던 것 같다. MBTI의 유행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이성과 감성이 철저하게 분리된 사회가 도래했다. 단순하게 차가운 사회라고 진단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닌 사회 구성원이 감정 행위를 왜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결국 핵심은 사회적 수용에 대한 정서 문제를 감정(감성)의 논리로도 해석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당도와 신뢰도의 측면에서 어떠한 감정 혹은 감성을 분석단위로 채택해야 하는 게 적절한가? 맥락상 어색한 감은 있지만 일명 2019년 “조국사태” 이후 사회의 공정성 문제가 한창 이슈였을 때, ‘한(恨)’이라는 감정, 즉, ‘울분’의 감정이 분석단위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이때는 ‘PTED(외상 후 울분장애)’라는 정신장애 척도가 주 분석도구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서독인에 비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빈곤한 동독인들이 부당함과 불공정함을 호소하는 심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린든이라는 정신의학자가 제시한 개념이다. 화병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와는 구별되는 진단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울분장애’는 일종의 적응장애로써 직장 내 따돌림과 같은 사회적으로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부정적인 생활사건에 의해 발병해 무력감을 불러오고 우울 등의 다른 정신질환을 동반한다고 한다.
아무튼 현재의 한국 사회의 감수성 문제에 대해 울분의 개념이 잘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업-취업-결혼-양육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한국인들의 삶에서 개인의 아픔은 생존주의적으로 중도 이탈의 원인으로 취급되며, 개인의 이름보다 개인의 학벌, 직장 등으로 개인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이렇게 “강한 한국인”이 탄생하고 있다. 어떤 상황이든 이를 악물고 버티는 탓에 서투른 감정표현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의 주체성과 개별성을 인정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버텨야 한다.”,“세상은 원래 그렇다.”,“남들도 다 그러고 산다.”와 같은 말로 타인의 경험과 아픔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데 서투름을 보인다. 사회적 과업에 의해 발생하는 “나다움에 대한 손실”을 보상받지 못하고, 어떠한 노력에도 개인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 환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을 숨기고 최대한 생존적인 움직임을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화와 슬픔을 숨기도록 강요되는 현상의 기저에서 울분의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한국 사회에 대해 단순하게 우울함과 느슨한 관계를 말하며, 차갑고 관계 회복이 필요한 사회라고 진단하는 것은 표면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한국 사회의 현실은 “희망”이 없는 사회이다. 고질적인 한국 사회는 이제 “서러워서 살겠나”를 넘어서서 “서러워도 어쩔 수 없다.”라는 말에 더 어울리게 되었다.
사회적 과업에서 중도 이탈을 하거나 진입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소수자로 부르며, 이들에 대한 감수성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현실을 ‘소외’로 바라볼 수 없다. 또,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회피’,세금에 대한 ‘무임승차’의 논리로 이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나 자신의 주체성과 개별성을 보장받은 경험이 없으며, 이를 참고 극복해내는 것이 당연해진 환경에서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쓴다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감수성이라는 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성과 함께 감정적인 노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노동은 감정적인 여유가 충분히 갖춰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장 소수자에 대한 지원이 잘 이루어지는 복지국가로 불리는 북유럽 사회와 비교해 한국 사회의 직업구조와 그에 따른 편차를 참고했을 때 워라밸이나 삶의 수준 자체가 결이 다르다. 편견이 없는 문화권은 그만큼 사람들 개개인의 개별성과 개성이 보장받는다. 본인이 인정을 받은 경험으로 타인의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환경적 여건 자체가 다르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하다지만, 통합정책을 접하는 몇몇 사람들의 마음에는 “왜 나는 안 되고 쟤네들만..”이라며 쭈그려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울분적인 감정은 우리 사회에서는 유치하다고, 어른스럽지 않다고, 철이 없다고, 인권 감수성이 없다고, 다양한 이유로 무시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유치한 마음, 인권 감수성이 없는 본질적인 마음을 위로하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나의 아픔과 사정조차 인정을 못 받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위해 세금을 분배하고, 경사로를 만든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한편, 사회관계에서 겪는 부정적인 사건을 외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점, 이에 따른 영향으로써 우울과 무력감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울분척도 등을 활용한 사회현상 분석에 관련된 자료량이 현저히 적은 것을 볼 때 이와 관련한 후속연구가 크게 성장하지 못한 거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사실은 최근의 사회과학은 사회경제논리가 아닌 ‘개별성’을 담보할 수 있는 영성과 영적 안녕 등에 대한 논의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점차 다원화되는 사회에서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접근방식이 사회갈등과 통합의 논의에 있어 새로운 논점을 제시해 주리라 기대한다. 따라서 이제는 특정 집단을 계몽하는 도구가 아닌 치유의 개념으로써 감수성을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위의 내용은 여러 선행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아 몇 가지 논리적 허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소수자들을 수용 받는 존재로 규정 함으로써 그들이 사회에 건네는 ‘환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둘째, 감정행위와 이성을 분리한 특정한 기준이나 배경을 제시하지 않아 오히려 감성과 이성에 대한 경계를 인정해 버렸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취준도 생각하게 되고 내 주변의 4학년들만 보더라도 봉사나 대외활동에 치여 살면서 겨우 학기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서 복지적인 실천이나 사회적 이해를 요구하는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데 회의감이 들었고, 이러한 감정의 원인과 흐름을 최대한 글로 담아보고 싶었다. 이러한 욕심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쓰여진 글이지만 그럼에도 여러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