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김동춘 두 교수님이 퇴임했다. 조효제 교수님은 최근 이슈화 되는 기후위기를 ‘인권’이라는 시각으로 분석해 내는 작업을 함으로써 사회학의 새 연구영역을 여신 분이고, 김동춘 교수님은 계급(능력주의 담론), 역사사회학 분야에서 출판과 학술활동을 활발히 하시며 결과적으로 ‘전쟁사회’라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신 분이다.
이렇듯 사회학에서 석학이라 불릴만한 두 교수님은 나에게 사회학을 선물해주신 분들이기도 하다. 조효제 교수님을 통해 ‘사회학적 상상력’을 알게 되었고, 김동춘 교수님을 통해 계급과 역사를 다루는 거시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두 분이 나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 사회학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우울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학이 왜 있어야 하고, 다른 사회과학과 학문과는 무슨 차별점이 있는지, 사회학이 설 자리는 어디인지 진심으로 궁금할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최근 유행하는 사회학의 위기와 관련한 한 학생이 두 교수님께 위와 같은 질문을 했다. 사회학은 사회과학이니 이론과 방법론 중심의 교과과정을 가지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학부생이 엄밀한 연구성을 가지고 현상을 분석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렇게 따지면 사실 사회학이 정치학과 경제학 등 타학문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사회과학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기는 비판이지만 사회학은 특히나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며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을 30년 동안 해온 교수님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보니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다만, 두 교수님의 공통된 의견은 그람시의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말로 귀결될 수 있겠다. 가끔 사회학은 “과학”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이 학문을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배될 때가 많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사회 자체를 바라보는 학문이 무조건 이성적일 수 있을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당장 청년문제만 보더라도 ‘88만원 세대’, 고착화 된 사회구조 등 객관적으로 사회를 바라봐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학에 있어 ‘역사’라는 분석단위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역사분석을 성찰의 개념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이에 더해서 역사 분석의 의의가 과거에서 단서를 얻어 미래를 긍정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어쩌면 이것은 한국사회학만의 고유한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세대는 사회가 절망적일 때 이 역시도 언젠가변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목격해 온 세대”라는 김동춘 교수님의 말에는 ‘낙관’이라는 가치가 녹아 있던 것 같다. 역사를 분석하는 의의는 언젠가는 지나가는 것의 가치, 그리고 이 가치를 떠나 보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사회학은 ‘역사’와 함께 ‘개인(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분석단위를 소중히 한다.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어쩔 때는 슬프기도 하지만, 사소한 것으로 웃기도 하는 만큼 역사의 논리는 개인의 삶의 논리와 밀접해 있다. 결국 역사의 논리를 파악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맥락을 짚어가는 과정에 불과하며, 이러한 학문적 전제가 곧 사회학적 상상력, 혹은 사회학의 목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사회학은 단순한 과학으로 취급받기에는 너무 아까운 학문인 것 같다. 사회학은 과학이지만, 인문학이기도 하다. 최근 사회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담론으로써 ‘인문학적 사회학’이 등장한 이유도 현재의 사회학이 ‘양적연구’, ‘방법론’ 등의 과학적 측정과 증명에 얽매여 개인이라는 주체를 설명하려는 사회학 고유의 임무를 져버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사회과학은 경제학과 정치학에 잠시 맡겨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우리 학교가 좋은 학벌라인에 있는 것도 아닌데 과학적인 사회학이 학부생 수준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결국 사회학의 분석이 현실과 괴리가 있음에도 계속 사회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학이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국가폭력과 북한인권에 대한 질문이 나왔는데, 두 교수님 모두 “인권침해가 북한의 책임에 있음을 인정할 것”을 전제하고, “그래도 그들과의 대화”를 강조하며, “북한이라는 곳 자체가 분노보다는 식민지 역사의 슬픔으로 방어가 만연한 곳”이라는 연민적인 분석이 교수님들의 답이었다. 이러한 사회학 석학들의 분석은 과학적일까? 또, 이러한 분석이 경제학과 정치학과는 다른 점이 무엇일까? 과학적인, 혹은 이성적인 분석을 넘어서 이를 실천하는 연대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인문학적 시각이 곧 다른 사회과학 학문과 구별되는 사회학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2. 왜 우리는 갈라졌는가?: 사회학의 역할, 정치적 논리에서 사회적 가치의 왜곡을 지켜내는 것.
1) 현 인권문제 접근법의 간과: “조건형성접근법”
조효제 교수님은 인권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기록하신 분이다. 하버드로스쿨 펠로우나, 베를린 자유대학 강사를 비롯해 인권학회회장을 맡으시는 등 평생을 인권연구에 몸 바쳐 오셨다. 이번 강연에서 조효제 교수님이 강조한 것은 세계인권선언 28조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의 핵심은 기준이행접근법과 조건형성접근법의 50대50의 배합이 곧 인권문제 해결이라는 점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최근 인권문제의 접근은 너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즉, 행위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는 내용이다. 즉, 혐오발언을 규제하거나 피해자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인권문제의 해결방식이 옳지만, 왜 효과성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계인권선언 28조 이전의 27조까지는 휴식의 권리, 노동의 권리, 불가침의 권리 등 형식적인 내용이 나오지만 28조는 정확히 “이러한 것들을 위한 조건이 형성되어야 가능하다.”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다른 선언들도 구조적 조건의 형성과,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 건설 촉진을 전제로 인권을 언급하고 있다.
2) 한국사회의 혐오와 갈등의 원인: 정치적 왜곡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회복지사의 인권이교수님은 든 여성의 인권이든 인권을 말할 때 이용자와 대상자, 혹은 남성과 여성 등이 대결하는 갈등구도가 여전히 주 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뷔페니즘”이 되었고,퀴어는 “토크니즘”, 환경은 “그린워싱”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이다. 차별금지법, 마르크스주의적인 해결방안이 인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구조적 요인을 간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혐오표현은 신자유주의와 연관된다. 불평등과 실업률이라는 사회적 분노 속에서 희생양을 찾는 현상은 곧 혐오표현으로 귀결된다. 특히 청년 젠더갈등을 보면 더더욱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정치권은 이러한 현상을 놓치지 않고, 어쩌면 정당성과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과도한 성별정책과 소수자정책을 펼쳐온 전례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책은 수혜자와 비수혜자가 명확히 나눌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가부장제’ 등의 용어로 한 쪽을 가치절하 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의도하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현실적으로 실질적 생산인구에 소수자가 참여해야 한다는 과업이 존재하더라도, 또 현실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꾸려면 때로는 논리보다 비논리적으로 밀어 붙어야 한다는 점(의료대란)이 존재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회의 시선은 그렇다.
결국 정치적인 과정에서 인권의 가치는 “뷔페니즘”,“토크니즘”,“그린워싱”으로 왜곡된다. 조건형성접근법은 이러한 왜곡을 막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다. 청년젠더갈등의 해결책은 실업과 일자리에 대한 구조적 개선을 할 수 있는 정책이 장기적으로 먼저 시행해 자연스럽게 돌봄과 여성정책이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있을 것이다. 결국 여성정책과 돌봄정책으로 인한 갈등을 한 쪽의 무지함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청년의 단합이 이끌어지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 우리사회는 “누가 더 힘든가?”, “누가 더 지원이 필요한가?”에 너무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본질적인 인구학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권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예방차원의 조건형성 접근법이 필요하겠다.
부자증세, 사회보장 축소, 학벌체계, 선별주의 원칙을 공고히 하는 데 있어 갈등만큼 더 중요한 원동력은 없다. 인권의 신자유주의화를 극복하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조효제 교수님 강연의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3. 도피의 역사, 혹은 변화의 역사
김동춘 교수님의 글은 꽤 많이 읽어보았다. 그런데 가끔 글을 읽을 때 마다 “이 교수님은 연구주제도 다양하고.. 노동이나 계급에는 식견이 뛰어나신데 의외로 현장에서는 보이시지 않는다.”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퇴임식에서 김동춘 교수님은 이러한 독자들에게 본인의 도망침을 회고했다.
큰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냥 80년대에 살아남기 위해 학자의 길을 선택했고, 어쩌다 보니 “좌파 학자”로 찍혀 강사를 전전하다 우리 학교가 겨우 받아줬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노동계급에 관심을 가졌지만, 90년대 사회주의가 무너지며 사회주의 대신 사회민주주의로 연구의 틀을 바꾸었고, 이후 역사사회학을 하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려 했는데, 한계를 느끼고 지리적 위치에 따른 연구 역량에 회의감을 느껴 이제는 지리결정론을 연구하신다는 이야기였다.
최근 읽었던 책의 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대략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업적 외에 그들의 지적인 고민과 학계에서 벌어지는 정쟁을 극복하고 학문적 성취를 쟁취하는 과정을 조망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아무튼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이 책이 생각났던 것 같다. 사회주의-레닌주의-사회민주주의-아나키즘까지 변모해가는 본인의 모습을 도피자라고 표현하셨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냥 자연스러운 변화 같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역사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이니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파악하는 학문의 석학이신만큼 본인을 너무 자책하지는 않으셨으면 한다. 사회학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알기 위한 공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4. 왜 한국사회학은 작을까?
식민지라는 개념, 혹은 주권국가라는 개념이 있을까? 우리는 ‘잔재’라고 표현하는 것들은 이미 내면화 되어있지 않은가? 김동춘 교수님이 역사사회학 연구를 하며 가지신 의문이라고 한다. 사실 이는 한국 사회학의 규모와도 연결된다. 교수님이 한국전쟁 연구를 깊이 못하셨던 이유도, 자료가 한국에는 잘 없고, 그렇다고 이를 이을 후계자를 찾기도 어렵고, 일어와 러시아어 중국어를 지금 하기에도 늦었다는 현실적인 한국 사회학의 역량에 대한 평가에 있었다. “큰 사상은 큰 나라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 방법론적 일국주의, 즉, 한 국가를 보려면 전체 국가의 시선을 보아야 한다는 이론을 실현하기에는 한국은 너무나도 역량이 작은 것 같다. 교수님도 브루스 커밍스를 만날 때 마다 그는 세계적인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보는데, 본인은 한국사례만을 분석하는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열등감이 꽤 들으셨던 모양이다.
사회학과 학생들이 꼭 하는 질문은 “왜 우리나라는 고프만과 짐멜 같은 학자가 나올 수 없나요?”이다. 답은 간단한데, 그냥 미국이나 영국이 주류여서 그렇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국가만큼 사회학적으로 특별한 분석 대상이 있을까 싶다. 이제 우리 사회학계도 주류로 가려는 시도보다 한국을 얼마나 잘 볼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췄으면 한다. 최근에는 질적, 양적 연구방법론을 한국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장수복 교수님은 아예 한국 사회학의 역사와 담론을 주제로 약 7권의 대서사를 작업하시기도 했다. 과연 한국만의 사회학이 정립될 수 있을지 지켜 볼만한 부분이다.
조효제 교수님의 따님이 “우리 아빠는 항상 책상에 앉아 뒷모습만을 보였고, 가족보다 학교를 사랑했었다. 섭섭한 마음이지만, 오늘 아빠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을 보니 마음이 풀렸다.”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내가 받은 사회학이라는 선물에 교수님의 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감사히 인정한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에 있어서 두 분의 앞길을 응원하는 마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