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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과학사 이야기 :17세기 18세기 과학

qusdnwls 2024. 3. 24. 00:39

시작하며

 

1.17세기 18세기 이전의 서양과학(고대,중세의 과학)

 

-고대의 과학

고대의 과학자는 누구였을까? 서양사를 기준으로 최초의 과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 같은 자연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가설을 세웠다. 예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라는 가설을 세웠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은 증명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견해에 바탕을 둔 가설 중심으로 과학을 사고했다는 비판점이 있겠지만 이들은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Why?'라는 질문을 세상에 던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던진 호기심은 후대에 다양한 학자들이 그 가설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학문 분야를 개척해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세상에 호기심을 던진 자연철학자 중 서양 과학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냐고 묻는다면 과학 전반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 지배적인 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에시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곧 17세기 이전까지의 천동설로서 하늘을 지배했다.

 

-서양 과학발전의 과제 종교’(중세 신학과 과학의 타협)

 

  로마가 지중해 패권으로 등장하고 화려한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며 쇠퇴할 때 유럽 땅에 남기고 간 중요한 문명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종교, , 로마 카톨릭이었다. 보통 현재 과학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문명이 무엇이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대부분이 종교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종교의 대부분은 기독교를 뜻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12세기부터 르네상스 시기인 15세기 정도까지의 중세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번역 사업으로 고대의 과학이 중세 유럽에 들어오고 그 지식들은 기존의 신학과 공존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중세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것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였기에 더더욱 신앙과 상충되는 분위기가 중세에 만들어졌는데 그때 아퀴나스는 이중 신앙론을 내세우며 과학은 성서를 해석하는 하나의 언어로써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 과학은 인간의 지식에서 진리를 도달하는 것이고 신학은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진리를 성서 말씀에 따라 도달하는 것을 말하며 이때 성서 말씀을 인간에게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과학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중세의 과학과 종교는 성서를 위한 과학으로 타협점을 찾게 되었다,


 

2.서양 과학발전의 시작 르네상스’, ‘종교개혁

 

-종교로부터 거리두기, 다양한 기술들(인쇄술)

17세기 과학은 역사적으로 두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15세기에 발생한 르네상스에 따른 고대 문화의 부흥이다. 이 시기에 유입된 다양한 고대 그리스의 원전 등은 중세에는 없었던 고대의 과학이 전파되었다. 이러한 고대의 과학은 새로운 탐구의 기회를 제공했는데 그 예시는 과학혁명의 시작이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신플라톤주의에 따른 지동설이다. ,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에 따라 인간이 단순히 신의 피조물에서 벗어나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활자 인쇄술과 같은 기술적 발전은 성서 등의 지식이 대중에게 전파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이러한 지식에 대한 대중의 의문과 궁금증은 과학혁명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 당시 발달한 상공업에 따른 안경과 같은 발명은 향후 과학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천문학에서 천체를 관측하는 망원경과 인간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에 영향을 주게 된다. 두 번째는 종교개혁이다. 당시 중세의 과학관은 신학에 결부되어있었지만 종교개혁으로 기독교의 체계가 흔들리자 중세의 과학관도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본론

 

1.17세기 과학(과학혁명)

 

-과학혁명

 

  ‘과학혁명은 대체로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적 대발견과 과학적 변혁을 뜻한다.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되어 아이작 뉴턴의 탄생으로 끝이 났다고 알려진 이 변혁은 서양사가 근대로 진입하기 위한 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서양의 근대화는 과학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이 혁명을 위한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종교의 이해관계에서 거리를 두고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의 세계관과 이전의 과학들을 최대한 과학적인 방법(귀납, 실험, 검증)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전의 과학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 등의 전통적 지식에 의해서 이미 완성되어있었는데 17세기 이후의 과학은 17세기 이전의 과학에 대한 의문을 검증하고 해결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혁명적인 모습의 사상적 기초는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연역법 검증기계적 철학관이다.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는 과학혁명의 시작을 알린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관을 받아들인 결과물이었는데 천동설은 달력의 오류 등의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성과 조화를 중요시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의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지동설을 고안해낸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과학혁명의 시작인 이유는 첫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학 중심의 과학의 오류와 의문을 제시한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둘째는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스콜라 학자 등에 의해서 신학과 과학적으로 비판을 받았는데 이 비판점들이 당시 르네상스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해결되거나 검증되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는 곧 역학분야의 발전과 천문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셋째는 앞의 맥락과 같이 과거의 해부학과 연금술이 다시 검증의 대상이 되고 이는 곧 지동설에 따른 인간의 존재를 다시 탐구함과 동시에 의학 등의 생명과학의 발전과 화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갈리레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은 17세기 과학혁명을 여는 중요한 저서이다. 왜 그럴까? 이 책의 지동설은 곧 고대부터 중세까지 지배한 과학관인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논리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이는 중세 때 과학은 성서를 해석하는 언어에 불과하다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논리적 비약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큰 도전을 한 과학관이었고 이러한 논리적 비약으로 인해 루터 등 종교와 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17세기 과학은 과학이라는 분야의 폭발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끌었다는 의미에서 과학혁명의 시대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부족한 논리를 여러 과학자들이 직접 실험하고 관찰하며, 증명하는 것에서 지금 우리가 아는 과학이 대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더 이상 과학이 신앙이 포용한 학문이 아님을 뜻하고 있다. 물론 과학혁명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기독교였지만 그들의 탐구 방식은 더 이상 성서를 위한 과학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케플러는 수학적으로 지동설에 근거를 부여했고 이를 케플러의 3법칙이라고 부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케플러의 증명은 이전에 코페르니쿠스의 치명적인 실수였던 천동설의 주전원을 시간이 흐른 뒤 지동설에 다시 도입한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해주었는데, 케플러의 타원궤도는 더 이상 주전원에 의존하지 않는 지구의 새로운 궤도를 제공했고 이는 지동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갈리레오는 직접 망원경으로 불변이라고 여겨진 우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우주의 태양과 달을 관측하고 우주의 행성과 위성이 움직이며 지구보다 불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는 이전 고대 자연철학자들이 생각한 불변의 우주를 반박하는 근거가 되었다. , 갈리레오는 금성의 위상을 관측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초승달, 상현달 등의 모습을 띄는 금성의 변화를 보고 이는 천동설의 논리적 구조로는 불가능한 현상임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갈릴레오의 관측은 지동설과 17세기 과학의 굉장히 중요한 근거와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뉴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서 과학혁명이 시작되었다면 과학혁명의 끝은 무엇일까? 보통 과학혁명을 완성한 사람은 모두가 잘 아는 아이작 뉴턴이다. 뉴턴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 <프린키피아>는 앞서 살펴 본 여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그에 대한 수학적 증명을 내용에 담고 있다. 또 뉴턴은 저서 <광학>을 통해 빛과 색깔에 대한 연구를 정리했다. 과학혁명을 완성한 뉴턴의 업적을 대표적으로 나타내주는 이 두 책은 근대 초기 이후의 과학의 형성에 토대를 닦았다. 이 책에서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을 증명하면서 지구는 타원 궤도와 만유인력으로 필연적으로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뉴턴은 결과적으로 지동설로부터 시작된 긴 150년에 걸친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과학혁명의 시대를 종결 시킨다.

 

-과학혁명 시대 과학의 특징(17세기 이전 과학과의 차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을 극단적으로 요약하자면 150년에 걸친 지동설에 대한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7세기에는 앞서 언급한 지구과학 뿐만 아니라 해부와 세포의 발견 등 생명과학의 발전과 보일의 법칙 등 화학분야의 개척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지동설은 17세기 이전의 과학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논리와 세계관을 파괴하고 성서의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을 위한 과학을 모색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17세기의 과학의 발전은 어떤 분야든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과학과 차이점을 보인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17세기 이전의 과학은 최초의 자연철학자들이 세상에 던진 질문 중 ‘Why?'가 중심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른 과학을 정당화하기 위한 17세기 이전의 과학은 결국은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견해로 의견이 모였다. 반면, 17세기 이후의 과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시작으로 ’How?'라는 질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령, 혜성이 떨어지는 현상을 17세기 이전의 사람들이 목격한다면 왜 혜성은 떨어지고, 왜 혜성은 아래로 떨어질까? 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으로 설명하려고 했을 것이며 혹은 헤성이 떨어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17세기 이후의 과학자들은 어떨까? 아마 그들은 혜성이 떨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왜 혜성이 떨어질까?,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에 따른 현상일 텐데 과연 이것을 어떻게증명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맞을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17세기 이후의 과학은 17세기 이전과 달리 신 중심의 사고보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연현상을 설명하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17세기 이후의 과학의 특징은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연역적 방법을 추구했고 이에 대한 수행방식으로 실험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18세기 과학(린네 분류체계, 제너의 종두법)

 

17세기 과학의 영향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시대가 곧 18세기라고 볼 수 있다. 18세기는 17세기 때 만들어진 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의 기회를 계기로 각종 분야의 과학들이 발전하는 시기였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인간을 위한 과학이 점차적으로 모습을 키워 나아가는 것이었다. , 인간 사회를 위한 과학적 지식을 활용한 응용과학이 새로운 과학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린네의 분류체계와 제너의 종두법이다.

린네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생물들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분류할지에 대한 틀을 제공한 학자이다. 그는 <자연의 체계>에서 생물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이전에 최초로 생물을 분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 체계의 한계를 넘어서 생물학에 기반을 한 세세한 분류를 했다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당시 지방과 국가에 따라 생물을 부르는 명칭이 달랐고 명칭뿐만 아니라 관습 등에 따라 단어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분류를 해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후의 린네의 이명법은 뜻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명법은 현재 생물학의 학명에 시초라고 할 만큼 당시 대중적이던 라틴어로 생물의 이름을 지은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호모 사피엔스가 그 대표적인 예시인데 호모는 지적인이라는 형용사고 사피엔스는 사람이라는 명사를 라틴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지구상에서 수 없이 발견되던 생물들은 빠르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연구 대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생물을 계------종의 단계로 분류하는 린네의 시도는 아무리 많은 생물이라도 생물학적으로 공통점이 있으며 만약 차이점이 존재한다면 어떤 생물학적인 차이가 있는지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 린네의 분류체계는 생물학에서 연구의 속도와 정확한 정리의 틀을 마련해주었고 이를 통해 인간은 인간 자신과 다른 생물들을 비교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린네와 함께 18세기 과학을 보여주는 사람은 에드워드 제너이다. 제너는 과학자가 아닌 의사지만 과학을 의학에 활용하는 등의 응용과학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제너의 가장 큰 업적은 종두법이다. 제너는 전염병이고 치사율이 높은 천연두의 해결을 소의 우두에서 찾았다. 그는 마을의 한 여성에 의해 우두에 걸린 뒤에는 천연두에 면역을 가진다는 가설을 세웠고 한 소년에게 직접 소의 고름을 주입해 우두에 걸리게 한 뒤, 소년이 우두를 회복하자 천연두 주사를 주입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몇 차례를 실험한 뒤 제너는 우두가 천연두의 해결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천연두를 우두로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이를 종두법이라고 부른다.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종두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다. 전염병은 지금까지 역사에서 인류가 대처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였고 심지어 전염병 중 하나인 흑사병은 봉건사회를 해체시키는 등 사회 전반을 바꾸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제너의 종두법은 이러한 전염병 해결에 전 세계에 도움을 주었다. 우리나라는 지석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종두법을 받아들였고 당시 유행한 마마 등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제너의 종두법은 백신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데 이후 항체 연구 등의 생명과학과 의학을 접목한 응용과학 분야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대한 결과로 세계보건기구(who) 1980년대에 천연두를 완전히 퇴치했다는 선언을 한다.

 

3.18세기 과학의 영향(산업혁명, 공업 기술 등의 발전)

 

18세기말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라는 공장제 대량 생산 시스템에 기반 한 산업화의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은 과학혁명을 겪어감에 따라 자유롭고 대중적이며 실험적인 과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18세기 산업혁명은 과학혁명이 완성되고 그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산업혁명 시기에는 기계라는 공장설비가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되었다. 과학혁명 이후 18세기의 영국의 과학은 왕립학회에서 서로가 실험을 통한 연구를 공유하며 자율적인 분위기로 발달하게 되었고 이후 많은 지방 과학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중 루나협회라는 단체에서 와트는 여러 열 과학을 접하기 시작하며 열기관을 고안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증기기관은 상징이 되었고 이후 운송기계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17세기의 과학혁명과 18세기의 과학은 산업혁명 시기 영국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과학단체에서 교류한 분위기 속에서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8세기의 계몽주의 확산에도 과학의 역할이 컸다. 이는 대표적으로 계몽주의의 이상과 걸맞게 과학은 인간 이성의 상징이라는 뜻으로 계몽주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으로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는 뉴턴의 과학이 곧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했고 뉴턴의 저서인 <프린키피아>를 번역했고 여러 계몽주의자들도 <백과전서> 등의 책에서 뉴턴의 과학과 생각을 집중적으로 반영했고 이와 관련해 사회변혁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뉴턴주의라는 새로운 이성의 가치관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확산된 계몽주의는 향후 시민혁명 등에 영향을 주었고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은 점차 신앙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위대한 과학자들과 과학협회, 과학아카데미 등의 기관들을 통해서 발전해 나아갔다.

 


결론-  17세기 18세기 과학의 의의

 

요람부터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다. 과학에서 요람은 고대 자연철학자들이 던진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서의 무덤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과학의 미래와 인간의 끝일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과학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 그 대답은 당연히 역사일 것이다. 역사 속에서 과학은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답해 오면서 발전해 왔다. 지금까지 본 과학의 역사들은 모두 연쇄적인 하나의 이야기이다. 사람으로 치면 과학은 자신만의 삶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 18세기 과학의 의의는 무엇일까? 물론 사회정치적인 면에서 앞서 보았듯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사람들의 사상과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봉건 사회 막바지 절대왕정 시기에 왕정의 큰 걸림돌이었던 신학의 힘을 약화시켰다는 것이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17세기와 18세기 이후의 과학이 발전하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19세기에는 다윈의 진화론 등 뉴턴의 과학과 더불어 종교와 거리를 더욱 멀리 두게 되면서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제시한 과학의 방향으로 다양한 과학적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전파와 전기, 그리고 화학과 지질 등의 과학 분야가 발전하자 과학과 기술은 더 밀접해졌고 흔히 말하는 테크놀로지 사회를 인간들이 구축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는 문명의 발전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이에 따른 전쟁과 탄압의 새로운 기회라는 어두운 측면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과학의 무덤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그것을 알려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의 역사일 것이다.

 


참고자료

 

1. 이문규, 2015,과학사 산책, 소리내

 

2. 김성근, 2009,교양으로 읽는 서양 과학사, 안티쿠스

 

3. 손영운, 2004,청소년을 위한 서양과학사- 탐구심을 길러주는 서양과학 이야기,

두리미디어

 

4. 오창희, 1999, 과학혁명에 미친 종교개혁의 영향,과학사상,28, 범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