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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1920(원본),<거대한 전환> _ "자유"란 무엇이고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

qusdnwls 2025. 4. 5. 00:45
 
거대한 전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제시하는 칼 폴라니의 고전『거대한 전환』. 이 책에서 칼 폴라니는 경제의 자유주의적 개념화에 의해 지배받은 19~20세기 사회에 관한 가장 객관적 시각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쓰여졌지만 당시의 시장 자유주의자들과 현재의 신자유주의자들의 근본적인 공통성을 밝혀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어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와 제3부

 

저자
칼 폴라니
출판
출판일
2009.06.30

 


 

 

거대한 전환: 영성적 개인주인자의 회고록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거대한 전환은 분명히 사회과학과 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 전반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19세기 자유문명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던 파시즘전쟁의 기원을 주제로 한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이 책의 정체성은 19세기 문명을 추동한 정신적 가치인 자유를 제도화 한 자기조정 시장체제에 대한 비판이 담긴 역사서이다. 그래서 나 역시 폴라니가 말하고자 하는 게 자유시장의 비인간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는 옮긴이의 말대로 폴라니를 오해하는 시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책이던 흔해 보이는 내용일지라도 저자의 관점과 전제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이때 폴라니 저작에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에 대한 폴라니의 인식이다. 사실 자유시장의 비인간성거대한 전환이 출판된 1920년대에 그리 특별한 주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19세기 근대 자유문명이 생겨난 이래로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즈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지속적으로 근대 자유시장경제의 폐해에 대해 만연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다만 폴라니는 정치경제학 특유의 비교사적 관점 뿐 아니라 인류학적 관점을 함께 차용했다. 아마 이는 폴라니가 저술의 목적을 전쟁과 냉전에서 목도한 전인적 자유의 훼손에서 찾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결국 폴라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시장경제체제의 비인간성이 아닌 것이다. , 자유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이러한 자유의 가치가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체제에 투영되어 어떻게 왜곡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떠한 사회적 현상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통시·구조·인류의 관점에서 규명하는 것이 폴라니의 일생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폴라니의 목적이 책의 목차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특히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복합사회의 자유라는 제목의 목차로 끝맺는 것이 인상 깊다. 반복하지만,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는 자유라는 가치철학이 왜곡되어 나타난 자기조정 시장과 파시즘의 발흥이라는 현상이 기인한 메커니즘을 통시적(비교사회학, 정치경제학)으로 분석함으로써 논리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폴라니는 평범한 사회주의자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에 불과하다.

 

‘19세기 자유문명이 도래했음에도 인류는 어떻게 파시즘과 전쟁이라는 선택으로 인간 본연의 자유를 저버리게 되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 관심을 갖는 것이거대한 전환을 읽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폴라니의 논지는 허구상품’,‘이중운동’,‘묻어 들어있음’,‘자기조정 시장의 개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여느 고전 경제학자들이 그렇듯 폴라니 역시 근대 경제현상의 특이점에 주목한다. 특히 시장의 경우 인류 역사 모든 순간에 존재했지만, 상호교환의 장이자 지역 단위로 존재했던 전통적인 시장과 달리 근대에 들어서자 시장은 세계적으로 한 단위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시장은 독자적으로 살아 숨 쉬며 어떠한 개입도 받지 않는다. 인간이 심장의 박동으로 생명을 느끼듯 시장은 외부의 개입과 감독이 없더라도 매순간 때에 맞게 조정되는 가격의 박동을 통해 경제활동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조정시장체제를 낯설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하다. 왜냐하면 자기조정 시장 체제는 자유시장, 자유무역, 금본위제, 브레튼우즈 체제 등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근현대 전반을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 우리는 지금도, 어쩌면 미래에도 자기조정 시장과 가장 친숙하게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장을 사회에서 분리해 독자적인 체제로 만드는 기획은 분명히 근대 특유의 자유라는 가치 덕분에 가능했다.

그런데 애초에 시장이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가격은 항상 외부의 개입 없이 조정될 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당장 정치와 정세에 따라 주식시장은 발작하고, 사회는 시장을 믿기보다 법이든 제도든 특정한 규제의 토대 위에서 자유의 몫을 최대화 하려 한다. 아무리 자기조정 시장체제의 주역인 자본가라 할지라도 급격한 환율변동 등에 있어 세계은행의 통제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폴라니는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기획은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자칫하면 다른 고전의 지식인들처럼 폴라니도 주로 자기조정 시장체제를 비판하는 데 지적 역량을 쏟은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그 전에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체제의 이상 자체가 애초에 실현될 수 없는 이상임을 강조하는 데 큰 힘을 들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시장은 곧 상품이 가격을 가지고 거래되는 장을 뜻한다. 만약 자기조정 시장체제라는 허상을 현실화하고자 한다면,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가격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도에서 토지,노동,화폐에 가격이 붙고 상품화가 되었으며, 폴라니는 이 세 가지를 허구상품으로 정의했다. 특히 화폐에 가격이 매겨짐으로써 화폐는 거래의 상징이 아니게 되었고, 토지와 노동에 가격이 매겨짐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파괴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근대 이전의 인간은 신분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근대 이후의 인간은 계급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현상에도 관성은 존재한다. 자기조정 시장이 건설됨에 따라 점차 인간의 자유와 자연이 훼손되었고 그 결과 계급투쟁이든 시민운동이든 인간과 자연을 보호하려는 저항적이고 연대적인 움직임역시 커져갔다. 결국 두 움직임이 부딪히고 사회적 긴장을 야기하게 된다. 이것이 폴라니가 말하는 이중운동의 개념이다. 어떠한 체제든 기본적으로 인간안보를 위협해서는 안 될 것이다. , 폴라니에 따르면 이중운동이라는 대립이 발생하는 것 자체가 자기조정 시장이 유토피아라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다. 결국 이중운동으로 인한 대립은 강한 긴장을 낳았고, 이러한 긴장이 격해지자 이를 대응하기 위한 강력한 통제 권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대응으로써 발생한 현상이 파시즘, 일국주의 등이다.

 

 

폴라니는 묻어 들어있음의 개념을 말하며 경제는 사회라는 붕어빵 반죽 안에 묻어 들어있는 팥 앙금과 같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폴라니에 따르면 경제가 사회에서 분리되는 것, 더 나아가 경제논리가 사회를 종속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자유로운 체제를 발명하기 위한 근대 프로젝트의 재료로 인간의 자유를 희생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 본 폴라니의 논지를 살펴보았을 때, 폴라니가 말한 자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전인적 자유’, 혹은 영성적 자유였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정파성과 현실성의 논리를 떠나서 12월 당시 빅 이벤트나 현재의 세계정세의 핵심에는 단연코 자유를 어떠한 관점으로 해석하는지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자유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대책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유란 국가든 개인이든 내면의 가치 및 지향을 침범받지 않는 것, , 안보와 보호의 논리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가치이다. 대표적으로 법의 논리로서 말하는 결사·표현·신체의 자유가 이에 해당한다. 반면, 또 누군가는 저러한 현상은 해소되지 않은 역사관을 명분으로 국가 안보의 논리를 우선시 해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교류할 수 있는 인간 안보를 저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법적인 논리보다는 개인 해방, 혹은 혁명과 같은 사회의 논리로서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는 이중적이다. 일례로,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에 있어 핵심은 싫어할 자유인간으로서 자존감을 훼손 받지 않을 자유라는 두 가지 자유 담론 해석의 충돌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면의 가치를 중요시하던 아버지와 19세기 다양한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좋든 싫든 폴라니는 자유의 이중성에 대해 일찍이 알아야 했다. 물론 폴라니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 관계 맺음을 통해 실체화 되는 사회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두 가지의 자유담론 중에서 굳이 고르자면 폴라니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의 자유, 배제로부터의 자유 등 인간안보의 관점에서 자유를 바라본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폴라니의 관점이 단순히 전쟁과 냉전이라는 시대배경의 비극만을 조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폴라니는 전쟁과 냉전을 거치며 두 가지 자유담론이 극단으로 이분화 되고 자유주의혹은 사회주의로 스스로를 정의한 채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선악설과 같은 인간의 본성에서 찾지 않고, 파시즘과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의 사회적 기원에서 찾았다. 본인의 의지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세상과 교류하는 능동적인 삶의 계기가 파괴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인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가?” 이는 폴라니가 우리에게 던진 일생의 질문이다. 스스로의 경험을 토대로 주체적인 를 정의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이 한 공동체 내에서 인정받는 것, 이것이 폴라니가 말하는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폴라니는 전인적 자유를 추구하는 영성적 개인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폴라니에게 있어 훼손된 전인적 자유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은 큰 관심사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폴라니가 제안한 기능 민주주의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비록 폴라니가 사회주의자이기는 했지만, 폴라니가 말한 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자 계급의 집권의 과정으로써 민주주의와는 결이 다른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폴라니의 기능 민주주의란 정당, 시민단체 등 각 기능단위에서 소비자, 생산자, 노동계급, 중산계급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각자의 사정을 대표해 토론 등으로 서로의 이해를 맞추어 가는 과정에 가까운 개념이다. 이때, 국가는 전체 공익을 대표하며 어느 한 쪽의 이해관계에 힘이 쏠리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능 민주주의는 특정 계급의 특수이익이 아닌 모든 계급의 보편이익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부분이 폴라니와 마르크스주의 간 차이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폴라니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시즘은 결국 노동계급이 보편이익을 선도하지 못하고 노동계급만의 특수이익을 추구해 중산층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해 발생한 결과이다.

 

물론 폴라니가 일정 부분추구한 정치경제학에서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란 쉽지 않다. 꼭 방법론의 측면이 아니더라도 일생의 측면을 보았을 때, 폴라니 역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노동자 계급을 보며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키우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책에서 소개되는 폴라니의 대표적인 개념인 이중운동’, ‘허구상품등은 각각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투쟁상품 물신성개념과 비슷한 논리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폴라니가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받았더라도 그것은 사회과학자로서의 마르크스가 아닌 역사가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 쪽에 가깝다. , 폴라니는 산업혁명 후 영국 노동계급의 실태를 보며 자본의 비인간성과 인간 해방이라는 담론을 사유했던 젊은 마르크스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사회과학자로서 장기동학적 분석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을 예측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망한 마르크스는 앞서 기능 민주주의개념에서 나타난 폴라니의 논리와 거리가 멀다. 이러한 미세한 핵심이 폴라니의 논리를 다소 난해하게 만들었고, 이런 이유 때문인지 냉전 구도에서 폴라니는 두 진영 어디에서도 특별히 환영 받지 못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폴라니를 일반적인 사회주의자로 분류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폴라니의 논리가 결국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저버리는 개혁론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게다가사회주의 계산논쟁등에서 보듯이 분배 문제에 있어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계획 경제를 주장하고 자유주의 쪽에서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폴라니는 기능 민주주의를 이야기 했다. 아마 폴라니는 분배 문제에 있어 상품과 재화를 배분할 때 시장과 국가 둘 중 어느 쪽이 주도해야 하는지 여부 보다는 각 이해관계가 서로의 현안을 대표해 논의하는 가치의 권위적 분배 과정을 중요시 여긴 듯하다. 이렇게만 보면 폴라니의 기능 민주주의 개념이 타협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고, 뭔가 냉전의 두 진영이 절충된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에 결국 폴라니가 말하는 것은 사회 민주주의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 역시 아니다. 폴라니의 논리는 일반적인 사회민주주의처럼 자본가 계급과 타협하여 더 나은 시장체제를 만드는 것과 완전히 반대된다. , 사회를 우선시하고 민주주의를 말했다고 해서 폴라니가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렇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폴라니의 난해한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를 보는 관점을 달리해야 하는 것 같다. 기존의 파시즘이든 계급투쟁이든 인류의 자유를 나름대로 해석한 저서들의 경우 대체로 사회과학적인 설명을 따랐지만, 그 탓에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계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꼭 마르크스주의가 정답일 수는 없고, 파시즘의 기원을 전체주의적 유산에서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이러한 틀을 벗어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폴라니의 저서가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현시대에 꼭 필요한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자유가 어떻게 훼손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사회과학적 시각 안에 인류학적 관점을 배치하며 풀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저서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인 복합사회의 자유를 꼽고 싶다. 결국 폴라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떠한 체제로 이행해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위해 혁명을 해야 한다거나 어떤 계급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더라도 그것은 논지 전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점차 복합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서 능동적으로 삶을 설계하고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창출하는 것’. 이것이 폴라니가 기능 민주주의 등의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는 소위 민주주의에 대해서 많은 불신을 표하기도 한다. 폴라니의 입장을 빌려 생각해 본다면, 복합사회 내에서 빈곤으로부터, 전쟁으로부터, 배제로부터 벗어나 개성을 실현하는 것은 일부의 특수이익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이익이므로 어쩌면 개인의 특수이익을 위한 표가 아닌 이웃과 자연을 위한 표를 행사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한 표를 던질 때 지속가능한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이라고 말했지만, 폴라니가 말하는 복합사회의 자유라는 것은 더더욱 허상일지도 모른다. 폴라니가 복합사회 내에서의 자유에 대해 명확히 이야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획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인류의 역사는 폴라니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실제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음에도 자기조정 시장체제를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인류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려 2008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서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폴라니는 인간에게 너무도 과도하고 이상적인 도덕윤리나 선함혹은 공감을 요구했던 게 아닌가 싶다. , 폴라니가 말하는 상호이해를 통한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기에는 공익의 대표이면서 파시즘의 사례처럼 강력한 통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의 이중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문제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폴라니의 논지가 현실적으로 수정되거나 재단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위와 같은 현실적인 평가가 폴라니의 논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폴라니는 경제학자였지만 주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라니는 실체적인 제도적인 경제학을 추구했다.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현실적인 계산이 아닌 경제제도가 인간의 경제적 행위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실체적으로 파악하는 폴라니의 경제학은 다소 문화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폴라니의 논지를 문화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지주형·구본우,2023, <칼 폴라니의 문화정치경제학: 허구적 상품화의 이론> 참고). 이는 폴라니의 시각이 제도와 법, 특정한 체제를 떠나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더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폴라니가 책에서 꽤 많은 지면을 통해 다루었듯 자기조정 시장과 사회보호운동이 충돌했을 때, 제도적인 대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과거 영국의 지주들은 그러한 거대한 전환에 대응하여 구빈법(스핀햄랜드 법)’을 시행하였다. 소위 노동이라는 허구 상품조차 되지 못하는 부랑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한 곳에 몰아넣고 사회에서 분리해 일정 부분의 급여를 지급하던 시도는 사회적으로 보기에 개인의 인격이 생산성을 기준으로 평가되어 말살된 것처럼 보였고, 결국 이러한 사회적 대응은 오히려 당시 자기조정 시장체제 건설의 명분이 되어버렸다.

 

, 개인의 자유를 법과 제도, 그리고 재정적으로 보장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법과 제도는 일정한 가치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 자유로운 상태를 원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시대에 우리가 말하는 이러한 자유는 특정한 신념의 영역을 구축하고 외부로부터 침범 받지 않고자 하는 기대와 노력을 통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그럼으로써 분명히 자유를 말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신념을 확장시키기보다 개인의 신념 안에 묶여 위축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는 법과 제도는 누군가의 특수이익을 보장해 줄지는 모르나 인간 모두가 누려야 할 표현, 전쟁, 빈곤, 배제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해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자유를 보장하려는 시도가 구속된 자유라는 역설과 불평등을 낳고 관계에 소진을 느끼는 독특한 개인주의를 낳았으며, 이는 곧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 전쟁, 빈곤, 갈등의 공포는 발견된 것인가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발명된 것인가? 결국 폴라니는 복잡한 체제나 제도를 설파하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주문한 것일지도 모른다. 법과 제도만으로는 갈등을 멈추기는 힘든 것 같다. 다양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 또한 특수한 이익을 반영하여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성격이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법과 제도가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변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제도로 반영 되어야 한다. 그 어느 때 보다 긴장이 고조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이러한 시대적 힘에 의해 폴라니의 논지가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현재 폴라니가 말한 자기조정 시장과 사회보호운동 간 충돌은 다층적 전쟁의 위험으로 번져가고 있다. 법도 제도도 해결하지 못하는 현재의 갈등은 향후 인류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시험과도 같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글에서 여럿 나왔듯 폴라니는 이중운동의 개념을 통해 사회의 동학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설명의 핵심은 갈등과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폴라니는 이중운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경제도, 정치도 아닌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고 연대하는 것만이 사회의 실체임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폴라니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은 나의 개성이 발현되는 것, 내가 능동적인 삶의 계기를 선택하는 기회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다소 이상적인 아이디어가 힘을 얻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정파성과 현실의 논리를 떠나 이러한 문제의식에 이끌린다면 칼 폴라니의거대한 전환을 훑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